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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언제나 대단해 ㅣ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오래 전부터 마스다 미리의 책을 꾸준하게 빌려다 보고 있다, 도서관에서. 선뜻 살 생각은나지 않아서. 비혼주의자로 여성의 소소한 일상을 저격하는 장면이 마음에 들어서 읽고 있는데, 우리 설해목님의 말쌈대로 변주 대신 반복을 택한 저자의 전략 때문인지 계속해서 시들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게 단점이랄까. 까다로운 나같은 독자들은 계속해서 무언가 새로운 걸 원하다고요.
주인공은 로바야마 로바코. 초급대학을 마친 저자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 오사카의 중소기업에 6년 정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만화로 발표한 모양이다. 원제는 <여사무원은 대단해> 정도인데, 시대에 맞게 제목을 바꾼 것 같다.
일본어로 “로바”가 노새를 뜻한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직장에서 노새처럼 일한다는 말이겠지. 로바는 딱히 고상한 취미도 없고, 결정적으로 애인도 없다. 비교적 칼퇴근을 하는 편이지만, 할 일도 갈 곳도 그리고 만날 사람도 없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소소한 일상의 저격이 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봉 연휴에도 연말에 들뜨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로바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역시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곳은 집 뿐이라는 것일까. 세태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나의 돌아갈 곳은 집 뿐이라는 걸까.
아저씨들과 함께 간 직원여행에서 남자 상사들은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술타령을 한다. 여직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집적거리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 장면이 보기 싫다. 어려서 답사 다닐 적에 예비역 형들이 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술타령 하는 장면과 묘하게 겹쳤다. 40년 정년을 마친 회사 상사가 자신처럼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며 깍뜻하게 인사하는 장면을 보며 ‘노새’ 로바는 자신도 저럴 수 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지만,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여행길에서 1,000엔 짜리 과자 대신 700엔 짜리 폰폰 쿠키는 다른 이들의 외면을 받는다. 정말 인사치레만 해야 하는 직장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예전에 자주 가지 못하는 해외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직장 동료들이 눈에 밟혀서 여행지 기념품 가게에서 열쇠고리를 주물럭거렸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사실 누가 요즘 열쇠고리가 필요한가 그래. 차라리 내가 모으는 현지 매그네트나... 그냥 웃음이 났다. 너무 리얼해서 말이지.
로바는 미혼여성이다 보니 언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는지, 결혼으로 직장을 떠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무언가 직장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어학원에도 다녀 보고 그러지만, 열심히 예습과 복습을 하지 않다 보니 그것도 시들하다. 화끈하게 연애라도 하면 좀 더 직장생활이 활기차지지 않을까 하는 공상에도 자주 젖어본다. 아무 일 없이 남사친이 찾아와 자신과 여유롭게 술 한 잔하는 장면도 그려보지만 역시나 현실세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 뿐이다. 돈도 안 드는 그런 공상을 안해본 직장인들이 있을까나. 내가 로또 사는 이유와 비슷하지 싶다. 적어도 발표하기 전까지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단돈 5천원으로 산 상상 티켓 정도라고 해두지 뭐.
어느 장면에선가 신입사원들의 시즌을 보며 직장에서 소모되는 젊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자아의 실현을 위한 노동 그리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은 생존에 꼭 필요하다. 아마 그만큼 21세기에도 일자리와 노동은 중요하다는 말이겠지. 로바로 직장에서 자신만 아는 일이 있다는 점을 뿌듯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직장이고 모임이고 어느 자리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건 의미있는 일이지 싶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없더라도 시스템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들라는 말을 해댄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노동자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소모품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바로 우울해진다. 뭐 그게 사실이어서 더 그럴 수도 있고.
간식으로 자비를 들여 컵수프를 달라고 하는 상사에게 똑 부러지게 회삿돈으로 산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직원, 여직원들이 그럴싸한 스테이크 먹게 기부금 상자를 마련하는 장면들은 나름 신선했다. 어떤 단면들은 모두 일본 경제가 호황기를 달리던 쇼와 시절이라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로바는 자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자신의 하루가 축적되어 인생이 된다고 한탄하지만, 지금의 나는 제발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누가 앙앙 울지도 않고 조용하게 하루가 갔으면 할 뿐. 무얼 더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