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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 - 독소전 밤하늘의 사냥꾼
얀 지음,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출신 그래픽 노블 작가 얀과 로맹 위고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다른 소설이나 그래픽 노블들이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로맹 위고는 특이하게도 공산주의 소련과 파시스트 나치 독일이 맞붙은 동부전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것도 육전이 아니라 공중전을 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시간적 배경은 1943년 겨울, 소련에서는 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독소전쟁이 시작된 지 2년여를 경과하는 시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정점으로 전쟁의 대세가 소련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인공 아돌프 불프 중위는 야간전투비행의 달인으로 무수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을 저승으로 보낸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다. 전설적인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을 모델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군의 야만적인 행태를 분노하는 불프 중위는 그야말로 나치 공군의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지우는 패기도 보여준다.
그의 맞수로 등장하는 소련군 전투기 조종사는 릴리야 리트바스키 동무다.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모든 파시스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독기로 무장한 릴리야는 구식 복엽기로 여자는 전투기를 조종할 수 없다는 남자 전투기 조종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한다. 독일군이나 소련군 모두 전투기 조종사들의 목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공군 내에서는 출격 5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불프를 감싸주던 슈나이더 단장이 릴리야에게 격추당하고 전사하자, 새로운 단장으로 친나치 성향의 상관이 부임하면서 자신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고 불프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다시 그려 넣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게다가 신출내기 막스라는 신임 전투기 조종사는 진짜 전투기와의 공중전 대신 보급기나 상대적으로 낙후한 비행기들을 상대로 실적을 꾸준하게 쌓는다. 당연히 불프와는 상극으로 치닫는다. 베레나는 홀아비 불프를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오로지 전투에만 관심을 가진 불프에게 거절당하고 막스에게 돌아선다.
짧은 그래픽 노블 <수리부엉이>에서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파국을 맞게 되는 과정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선 1944년 6월에 시작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육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독일 영내에까지 몰리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독일 공군의 마지막 작전이었던 ‘보덴플라테 작전’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리고 불프의 딸 로미는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 불프는 광적으로 소련기를 격추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한편, 릴리야는 두 번이나 독일군에게 격추당하고서도 기지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모두 불프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불프 역시 격추되어 적지에 떨어졌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기지로 복귀한다. 불프의 딸 로미가 건네눈 나무로 조각된 부엉이 부적은 미신에 매달리는 최첨단 병기를 작동하는 병사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야 할까.
불프가 독재가 히틀러를 증오하는 것처럼, 릴리야 역시 스탈린 동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실력을 갖춘 에이스들이라면 자고로 그들처럼 조국의 독재자들을 깔아뭉갤 수 있어야 한다는 설정이었을까. 불프와 릴리야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다. 불프의 딸 로미는 여자들을 죽이냐는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아빠 불프를 닦달한다. 불프는 과연 히틀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신념대로 조국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던 걸까?
드라마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 불프와 릴리야의 관계는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야만으로 점철된 전쟁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끝나고, 포로가 된 불프와 릴리야는 다시 만나게 된다.
오늘 도서관으로 달려가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을 3권이나 빌려왔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그야말로 전장에 핀 한 떨기 로맨스라고 해야 할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쭉 깔고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자 다음은 어떤 책을 읽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