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재판 - 가리옷 유다의 시복재판에 관한 보고서
발터 옌스 지음, 박상화 옮김 / 아침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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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복음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76년 발견된 <유다 복음서>는 기독교 기준에서 보면 이단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구속사 다시 말해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 <유다 복음서>의 핵심이다. 독일 출신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고전문헌학 학자인 발터 옌스는 바로 그 <유다 복음서>의 핵심 내용에 입각해서 이스카리옷 유다에 대한 시성 재판이라는 도발적인 설정 아래 재해석을 시도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듣는다면 바로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은전 서른 닢에 대사제장들의 수하들에게 “넘긴” 희대의 배신자가 바로 시카리(열심당원, 젤럿) 출신 유다라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실이 아니던가. 그런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를 이루는데 꼭 필요했던 신의 도구라는 주장은 재해석의 영역을 넘어, 그야말로 열띤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주장은 고대 그노시스파들의 그것과 무척 유사하다.

 

사건의 시발은 1960년 예루살렘 교구의 베르톨트 신부(독일 출신 프란시스코회 소속)가 유다를 시복 심의에 공식적으로 회부하면서 시작된다. 가톨릭에서 기적에 준하는 것을 기준으로 엄격한 심의를 거쳐야 복자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발터 옌스 교수는 먼저읽기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유다에게 시복 심의가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정통 기독교 성서해석에 따르면 열두 명의 사도 중에 재정을 맡았던 유다는 순전히 개인적 탐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리사이인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베르톨트 신부의 핵심 주장인 유다의 회심과 은전 서른 닢의 성전 반납 그리고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에 대한 키스 등은 죄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다는 순교자가 아니라 베엘제불의 자식이라는 주장이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양측의 첨예는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상이한 해석을 도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베르톨트 신부의 주장은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해서 유다가 마땅히 순교자라는 입장을 취한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신자들의 청원은 반드시 심사 혹은 재판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전례에 따라 베르톨트 신부의 청원은 이른바 사도재판에 회부된다. 베르톨트 신부의 주장은 묘하게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개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의 주장대로 유다가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 싸운 투사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신앙검찰관들은 베르톨트 신부가 제시한 사안들을 조목조목 부정한다. 그들은 성서 텍스트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처음부터 고수한다. 베르톨트 신부의 주장대로 유다가 순교자가 되어 복자가 된다면, 사탄이나 루시퍼도 다음 순서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는 논리도 등장한다. 다시 한 번 성서해석이 얼마나 어려운 임무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다. 베르톨트 신부는 행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 행간에 무엇을 채우는지에 따라 정통과 이단으로 나뉘게 되는지 신앙검찰관들은 정말 몰랐던 걸까. 재판은 무한정 길어지고 특별한 판결도 나지 않은 채 시간만 허송세월한다. 과연 현대의 시각으로 2천년에 있었던 일대 사건을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반전은 예심에 참가했던 예부성성의 전권대리인 에토레가 베르톨트 신부의 후계자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단적인 주장을 펼친 베르톨트 신부는 결국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병까지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베르톨트 신부가 주장한 대의는 에토레에게 전수되고, 에토레는 장장 12년을 끈 재판의 조속한 진행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유다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는 발터 옌스 교수가 이 책을 발표했던 1975년에는 신선했을 지 몰라도, <유다 복음서>의 내용과 그노시스파들의 주장이 널리 알려진 지금에는 색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다 같은 배신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순교자로 시복하자는 설정은 너무 멀리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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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2-21 14:36   좋아요 1 | URL
발터 옌스 교수의 소설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설명하더군요.

신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거부하지 않
고 받아들인 진정한 영웅이라는...

정말 영지주의적인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