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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평점 :

마침내 나는 <새벽의 약속>을 다 읽는데 성공했다. 지난 수년 동안 별짓을 다하면서도 빈번히 실패해 왔던 나의 로맹 가리 읽기는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이번 여름 로맹 가리 읽기의 시작과 끝은 어쩌면 바로 이 <새벽의 약속>으로 기록될 것이다.
러시아와 폴란드를 거쳐 위대한 배우였던 아버지와 편모슬하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자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은 정말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는 말에 속아 도돌이표를 하듯 무턱대고 읽고 또 읽고 또 실패했다. 그나마 올해 3월에 다시 읽기 시작해서 1부까지 읽은 것이 완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지난주에 2부부터 읽기 시작해서 결국 완독에 성공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그래.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위대한 프랑스인이 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주었다. 어쩌면 두려움과 실패를 모르는 로맹 가리의 어머니야말로 훗날 영웅이자 대사, 그리고 소설가로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 작가의 원천을 이루는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조력 없이 자존심 하나 만으로 타지에서 아들을 번듯하게 키우기란 너무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의 허풍은 폴란드의 시골 윌노 같은 마을에서는 그나마 먹혔을지 몰라도, 프랑스 니스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실패를 모르는 도전자였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야말로 넘쳐흘렀다.
GOD에게 짜장면이 있었다면, 로맹 가리의 어머니에게는 정오의 스테이크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고민과 갈등 그리고 회한마저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골루아즈 담배의 희부연 연기가 있었다. 아들은 오로지 어머니가 바라는 성공을 위해 내달렸다. 니스의 어느 테니스 코트에서 오로지 어머니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다는 수치스러운 광대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가. 나이든 자식들이라면 이제는 깨달을 수 있는 일들을 소설로 만나게 되는 장면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아, 나도 언제 그랬던가.
귀화한 프랑스인으로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1940년의 패전을 딛고 공군 장교가 되겠다는 청년의 결심은 태생적 한계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하사 계급장을 단 청년 로맹 가리는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절대 다수의 공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다양한 이유로 전사했지만, 로맹 가리는 어머니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했다. 니스의 어느 호텔에서 마침내 매니저로 자리 잡는데 성공한 어머니에게는 당뇨병이라는 치명적 질병과의 마지막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군 대열에 합류한 로맹 가리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나치 독일에 대항해서 많은 작전에 참가한 공로로 프랑스인들에게는 최고 영예라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비롯해서 드골 장군에게 직접 받은 영토 해방 훈장 그리고 무공훈장으로 자신의 군복을 장식하게 된다. 전쟁 중이라 비록 어머니와의 연락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이 근사하게 빗겨 나가는 와중에도 문학도로서의 꿈을 저버리지 않은 로맹 가리는 마침내 데뷔작 <유럽의 교육>을 발표하는데 성공한다. 아울러 어머니의 소망대로 대사가 되기 위한 영토 해방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는 희소식도 듣게 된다. 한 마디로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당한 수모와 고난을 보상해 줄 영광과 승리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과연 아들은 어머니의 운명적 해피엔드였던 것일까.
로맹 가리 전작을 읽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에서 로맹 가리의 문학의 근원을 밝혀주는 <새벽의 약속>이야말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첫 번째 숙제였다. 아마도 두 번째 숙제는 <새벽의 뿌리>가 될 것이다. 요즘 동시다발적으로 로맹 가리의 책들을 읽고 시작했는데, 한 명의 남자, 전쟁영웅, 문학가라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작가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는데 역시 문학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읽기 시작한 산문집 <인간의 문제>에 나오는 비평가들과의 신랄한 대화 역시 일조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 곳곳에 숨겨 놓은 이야기들의 단서 내지는 실마리를 찾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로맹 가리 작품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래도 희망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같은 주제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새벽의 약속>은 자세히 알려준다. 로맹 가리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퍼부은 사랑은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었던 것이다. 조국해방 전쟁에 분연히 나선 청년이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숱한 동료들이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 북아프리카, 지중해 그리고 크레타의 전역에서 수도 없이 전사하는 가운데서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가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고, 모든 기적의 원동력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진짜 멋진 약속이 아닌가.
한동안 나의 오랜 숙제였던 <새벽의 약속>을 읽으면서 과연 읽지 못할 책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물론 벽돌 두께만한 사이즈의 책들이 여전히 서가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