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김관식
窓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鹿車에 家具를 싣고
이끼 낀 숲길
영각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나물
鱸魚膾
江東으로 갈거나
歐陽修
글을 읽는
이 가을 밤에
"주여, 때가 왔습니다."
"시몬,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
'가을'하면 떠오르는 시의 첫 구절이에요. 첫 번째는 릴케의 '가을 날'이고 두 번째는 구르몽의 '낙엽'이예요(잘 아시죠? ^ ^). 한국인이고 동양인인데 가을하면 떠오르는 시가 한국인이나 동양인의 시가 아닌 것을 보면 외양만 한국인(동양인)이지 내면은 서양인의 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아요. 저만 그런가요? ^ ^
그런데 그리 멀지 않은 시기까지만 해도 '가을'하면 구양 수(歐陽 修)의 '추성부(秋聲賦)'와 장한(張翰)의 '순갱노회(蓴羹鱸膾)' 고사를 떠올리는 세대가 있었어요. 김관식(1934-1970) 시인으로 대표되는 세대지요.
사진은 강경 상고에 있는 김관식 시인의 '이 가을에'란 시비예요. 강경 상고는 김 시인의 모교예요. 이 학교에는 근대 건축 문화 유산인 '교장 사택'이 있어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인데 한식 양식 일식이 조합된 독특한 건물이에요(아래 사진). 건물을 구경하고 강경 상고를 한 번 둘러 보는데 운동장 가는 길에 이 시비가 있더군요.
위 시는 고사로 점철되어(?) 있어요. 구양 수의 '추성부'와 장한의 '순갱노어' 그리고 환소군(桓少君)의 '녹거(鹿車)'까지. 어찌보면 현대시가 아니라 한시를 현대시처럼 풀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이 시에 등장하는 추성부와 순갱노어 그리고 녹거의 고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를 깊이있게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아울러 이 시의 한자 표기 시어를 한글로 바꿔 표기하면 시를 읽는 맛이 떨어질 거예요.
구양 수의 추성부는 가을을 소리로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가을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설파한 에세이예요(정리 문제 참조). 순갱노회는 순채 나물과 농어회라는 뜻으로 진(晉)나라 장한과 관련된 고사예요. 가을 바람이 불면 장한은 늘 고향의 순채 나물과 농어회 맛을 그리워 했는데, 어느 가을 날 고향의 순채 나물과 농어회를 찾아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고 해요. 순갱노회는 명예나 부와 같은 외면적 가치보다는 자족이라는 내면적 가치를 우선한다는 의미의 고사예요. 녹거는 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란 뜻으로 후한의 환소군과 관련된 고사예요. 부유한 집에서 살던 환소군은 포선(鮑宣)이라는 가난한 선비에게 시집오게 됐는데, 준비했던 화려한 예물을 버리고 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에 소박한 물건만 싣고 시집을 왔다고 해요. 녹거는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고사예요.
'이 가을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위 고사들을 알고 나면 그리 어렵지 않게 감지돼요(물론 이 고사들을 잘 알지 못해도 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어요. 하지만 똑같은 이해라 해도 깊이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거예요). 숙살지기(肅殺之氣)로 모든 것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가을에 시인 또한 그런 천지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번다한 세속적 굴레를 벗고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 소박한 삶은 극도의 물질과 인간 관계의 궁핍으로 달성되기 어려워요. 따라서 시인이 추구하는 소박한 삶은 단지 소망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 소망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니예요. 그 소망이 있기에 극도의 물질과 인간 관계의 궁핍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지요. 안심입명(安心立命), 이것이 이 시의 종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시에 나온 한자 중 서너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鱸는 魚(물고기 어)와 盧(밥그릇 노)의 합자예요. 농어란 의미예요. 魚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盧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盧는 원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그릇으로, 그 색깔이 푸른 빛을 띄어요. 농어의 등 부분 색깔이 옅은 푸른 색을 띄기에 이 글자로 뜻 일부분을 보충했어요. 농어 로. 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鱸魚(노어), 鱸膾(노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膾는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會(모을 회)의 합자예요. 저민 고기란 뜻이에요. 月로 뜻을 표현했어요. 會는 음을 담당해요. 날고기란 뜻으로도 사용해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저민 날고기란 의미로요. 저민 고기회. 날고기 회. 膾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膾炙(회자), 肉膾(육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歐는 欠(하품 흠)과 區(지경 구)의 합자예요. 토한다란 의미예요. 토할 적에는 입을 벌리고 토하기 때문에 欠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하품 할 적에는 입을 크게 벌리잖아요? 區는 본래 물건[品, 물건 품]을 저장해 놓는다[匸, 감출 혜]란 의미인데, 여기서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토하는 것은 배속에 저장해(?) 놓은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란 의미로요. 토할 구. 성씨로도 사용되요. 성 구. 歐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歐泄(구설, 구토와 같은 뜻), 歐褚(구저, 구양 순과 저수량. 모두 서예의 대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修는 彡(터럭 삼)과 攸(달릴 유)의 합자예요. 몸과 의복의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한다란 의미예요. 彡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彡에는 (아름답게) 꾸미다란 의미가 내포돼 있거든요. 攸는 음을 담당하면서(유→수)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攸는 물이 넉넉하게 잘 흐른다는 의미인데,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리면 어디를 가든지 그같이 여유가 생기고 남의 존중을 받는다는 의미로요. 닦을 수. 修는 본래 외관을 단정하게 한다란 의미인데 후에는 내면을 단정하게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게 됐어요. 본뜻이 연역된 것이지요. 修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修養(수양), 修身(수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鱸 농어 로 膾 저민 고기(날고기) 회 歐 토할 구 修 닦을 수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肉( ) ( )身 ( )泄 ( )膾
3. 다음을 읽고 감상을 말해 보시오.
한 밤중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쪽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렸다. 왠지 섬쩍지근한 느낌이었다. 혼자 중얼 거렸다. "허~ 괴이하다. 처음엔 서걱서걱 거리더니 갑자기 쌩~ 거세진 느낌이네? 이건 꼭 야밤의 파도치는 소리나 몰아치는 빗소리 같구먼. 물건에 닿을 때는 꼭 쇠에 부딪힌 듯 쨍그렁 소리가 나네? 그러면서도 왠지 또 조용한 듯한 느낌은 뭘까? 아니다. 꼭 조용하다고만도 할 수 없다. 조용한 속에서도 뭔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나는 걸? 흡사 야밤에 함매(含枚)하고 이동하는 군대가 내는 소리랄까? 허~ 괴이하다."
시동을 불러 무슨 소리가 나니 정체를 알아 오라 하였다. 아이가 돌아와 말했다. "하늘엔 성월(星月)과 은하수가 밝고요, 사람의 자취는 하나도 없어요. 있는 거라곤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뿐예요."
"그렇구나! 내가 들은 것은 바로 가을이 내는 소리였구나. 가을, 너는 어이하여 온 것이냐? 가을, 너의 형색은 참담(慘淡)하니 구름과 안개도 도망하지. 너의 얼굴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처럼 높고 해처럼 빛나지. 너의 기운은 살벌[慄冽]하여 뼛속 깊이 침을 놓은 듯 하지. 너의 뜻은 쇄락[蕭條]하여 적막한 산천같지. 하여 너의 하는 일은 처절하면서 단호하고 망설임이 없지. 푸르른 풀들이 무성함을 뽐내고 아름다운 수목들이 울창함을 자랑하다가 너를 만나면 일순간에 퇴색하고 시들지. 이 모두는 네가 발산하는 매서운 기운의 여파 때문. 가을, 너는 죄수를 다루는 형관이랄 것이다. 시기로는 음의 절기랄 것이며 오행으론 금이랄 것이다. 이 모두는 천지의 의기(義氣)에 해당하는 것이니 너는 항상 숙살(肅殺)을 간직한 자로다.
하늘의 이치란 무엇인가? 봄에는 낳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 음악에도 이런 이치가 있지 않던가! 상성(商聲)은 서방의 음이며 이칙(夷則)은 7월의 음이잖던가! 상(商)은 곧 상(傷)이니 만물이 노쇠하면 비상(悲傷)하게 되는 것이요, 이(夷)는 곧 육(戮)이니 만물은 성시(盛時)를 지나면 죽게되는 것이다. 상성과 이칙은 곧 비상과 죽음이라는 가을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아~ 초목은 무정(無情)하여 때가 이르면 어김없이 영락하나 사람은 그렇지 않으려 한다. 유정(有情)한 존재로 만물의 영장이란 생각을 가지고 온갖 일로 심신을 괴롭히며 정기를 소모하고 있지만 초목처럼 시들지 않기를 바란다. 우스운 것은 힘과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일까지 염려하고 도모하려 한다는 것. 하니 점점 더 쇠약해져 몰골은 마른 나무같고 머리는 흰 이슬이 내린 것 같이 변한다. 어찌 금석(金石)같은 존재가 아니면서 초목처럼 시들지 않기를 바란단 말인가! 누가 너를 쇠하게 만들었는가? 하늘의 이치 때문인가? 무지한 너의 소행 때문인가? 가을이 찾아오는 소리에 놀랄 이유 하나도 없다! 가을이 찾아와 너를 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무지한 소행으로 네가 쇠하게 된 것이니."
시동은 듣는 둥 마는 둥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찌르르, 찌르르!" 왠지 내 말에 공감한다는 소리 같았다. (이상은 구양 수의 <추성부>입니다. 상당히 의역을 많이 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