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우뚝한데
옥소리 방울 소리 가무도 사라졌다.
아침에는 단청한 서까래에 남포의 구름이 날고
저녁에는 주렴을 걷고 서산의 비를 바라본다.
물에 어린 구름 그림자 언제나 유유한데
세상 바뀌고 세월은 흘러 몇 해나 지났던고.
이 누각의 주인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난간 밖의 강물만이 부질없이 흐른다. (왕발(王勃, 647-674), 김달진 역, 「등왕각(滕王閣)」)
옛 자취를 돌아볼 적엔 화려한 느낌보다 애틋한 느낌이 더해요. 위 시는 왕발이 등왕각 중수(重修) 기념식에 참석하여 지은 거예요. 기념식에 걸맞지 않게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생을 대비하며 쓸쓸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요. 왕발은 당시 화려했을 기념식도 먼 후일 언젠가는 후인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과거 등왕각에 대한 생각처럼, 쓸쓸하게 회고되는 기념식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화려한 중수식에서 이렇게 생각했으니, 만일 폐허가 된 등왕각을 방문했다면 더 애잔한 심사를 노래했을 거예요.
사진은 베트남 후에에 있는 티엔무 사원에서 찍은 거예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카이딘 황제(재위 1916-1925)가 티엔무 사원을 방문하고 지은 시와 서문을 새긴 비석인데, 티엔무 사원의 유래와 그곳에 있는 불탑 그리고 불탑에서 바라본 경치를 서술하고 이를 칠언율시로 노래하고 있어요.
御製 天姥寺福緣塔臨幸偶成一律 倂序
孟子曰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予續之曰 有名藍勝跡之謂也 奉我嘉裕皇帝 以橫山淸吟決計圖南 世傳 帝遇天嫗于此 贈香一株 囑帝持香沿江岸東行到香盡處可都 都成而寺興焉 勅建寺奉佛命名天姥山靈姥寺 奉我顯尊孝明皇帝 命崇修鑄大鐘 淸晨良夜 扣辰聲聞數十里外 蓋眞佛家醒世之洪寶也 奉我世祖高皇帝 中興之初 命工部大崇 修建前堂于寺 名大雄殿 曁我憲祖章皇帝 祈我順天高皇后八旬聖壽 因寺前築七層寶塔 屼出兜一座 莊嚴俯臨江渚 己未年季秋十五日 朕乘輦臨幸 命禮工二部將梯登 上有過去金身七尊七位 燦爛輝煌 光彩奪目 焚香瞻仰久之 四望躕踟 宛如身在雷音中 西望九陵 蔚葱佳氣 南望屛印 縹緲雲中 東望都城 樓臺盈視 北望巨壑 水色如藍 眞我國名藍之一奇境也 爰成一律 倂序 命勒于貞石以爲誌
天姥名藍駕晩來 登臨何啻到天台 七層寶塔冲霄立 一座空門特地排
伴奐當風澄俗慮 虛無對景淨塵懷 環瞻勝蹟欽前熱 善念功修幾肇培
啓定四年十一月二十七日
어제 천모사복연탑임행우성일률 병서
맹자왈 소위고국자 비위유교목지위야 유세신지위야 여속지왈 유명람승적지위야 봉아가유황제 이횡산청음결계도남 세전 제우천구우차 증향일주 촉제지향연강안동행도향진처가도 도성이사흥언 칙건사봉불명명천모산영모사 봉아현존효명황제 명숭수주대종 청신양야 구진성문수십리외 개진불가성세지홍보야 봉아세조고황제 중흥지초 명공부대숭 수건전당우사 명대웅전 기아헌조장황제 기아순천고황후팔순성수 인사전축칠층보탑 올출도일좌 장엄부림강저 기미년계추십오일 짐승련임행 명예공이부장제등 상유과거금신칠존칠위 찬란휘황 광채탈목 분향첨앙구지 사망주지 완여신재뇌음중 서망구릉 울총가기 남망병인 표묘운중 동망도성 누대영시 북망거학 수색여람 진아국명람지일기경야 원성일률 병서 명륵우정석이위지
천모명람가만래 등림하시도천태 칠층보탑충소립 일좌공문특지배
반환당풍징속려 허무대경정진회 환첨승적흠전열 선념공수기조배
계정사년십일월이십칠일
황제께서 지으심. 천로사 복연탑을 찾았다 시 한 수를 짓다. 서문을 붙인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른바 오래된 나라란 교목(키가 큰 오래된 나무)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신(대대로 벼슬한 고명한 신하)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보태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유명한 사찰에 뛰어난 승경 있는 곳을 오래된 나라라 말한다.” 태조인 가유황제께서 횡산 청음을 근거지로 남쪽 지역을 공략할 것을 도모하실 때였다. 세상에 전하길, 황제께서 이곳에서 천구(하늘에서 내려온 노파)를 만나셨다 한다. 그녀는 향나무 한그루를 주면서 그것을 갖고 강가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다 향기가 다하는 곳에 도읍을 정하라고 했으며 도읍이 이뤄지면 사찰이 흥성할 것이라 했다 한다. 황제께서는 칙령을 내려 절을 세우고 부처님을 모셨으며 절 이름을 '천모산영모사'라고 하셨다. 현존효명황제께서는 대신에게 명하여 대종(큰 종)을 주조케 하셨는바 맑은 아침과 이윽한 저물녘에 이를 치면 그 소리가 수십리 밖에 까지 들렸다. 참으로 세상을 깨우치려는 불가의 큰 보물이라 할 만했다. 세조고황제 중흥 초기에는 공부대신에게 명하여 절 앞에 건물을 짓도록 했고 ‘대웅전’이라 명명했다. 헌조위황제에 이르러 순천고황후의 팔순 생신에 장수를 기원하려 절 앞에 칠층보탑을 짓도록 했다. 보탑은 우뚝한 모습으로 장엄하게 강가를 조망했다. 기미년 가을 끝자락 십오일에 나는 가마를 타고 이 절에 이르렀다. 예부와 공부에 명하여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탑 위에 올랐다. 그곳에는 과거에 안치했던 금신(금칠한 조각상)의 세존 일곱 분이 있었는데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셨다. 향을 사르며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방을 조망하며 배회했는데 흡사 내 몸이 우뢰치는 소리 속에 있는듯하여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서쪽으로 구릉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충만하였고, 남쪽으로 병인을 바라보니 청백(푸르고 흰)의 구름 속에 잠겨 있었으며, 동쪽으로 도성을 바라보니 누대들이 시야에 가득했고, 북쪽으로 큰 골짜기들을 바라보니 물빛이 쪽풀과 같이 푸르렀다. 참으로 아국(우리나라) 명찰(유명한 사찰)의 일대 장관이라 할 만했다. 이에 시 한 수를 짓고 서를 덧붙였다. 명을 내려 좋은 돌에 새겨 남기도록 했다.
천모산 유명 사찰 저물녘에 가마 타고 찾아왔네
올라서 굽어보니 천태산(불교 성지)에 오른 듯
칠층보탑 하늘 뚫고 장엄하게 서 있고
일곱 부처님은 공중에 앉아 계신 듯
이곳서 바람 맞으니 속된 생각 씻겨지고
풍경을 바라보니 세속 생각 사라지는 듯
승경(멋진 경치)을 둘러보며 선대의 업적을 흠모하노니
선념과 공덕을 이어가리라
계정 사년(1919) 십일월 이십칠일
황제가 찬미했던 웅장한 불탑은 고색이 창연하고 화려한 금불상은 오간 데 없어요. 그가 바라봤을 강만이 여전히 유유하게 흐를 뿐이에요. 비문을 읽노라니 절로 애잔한 마음이 피어오르더군요. 왕발도 이러한 심정이었겠거니 싶었어요.
카이딘 황제는 우리나라 대한제국 시절의 고종이나 순종과 같은 황제였어요. 실질적인 지배권을 외세(프랑스)에 빼앗긴 꼭두각시 같은 황제였죠. 그가 시의 말미에서 노래한 ‘다짐’같은 것은 사실 실현할 길 없는 구두선에 불과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의 다짐은 기특(奇特)하기 보다는 애잔해요. 차라리 조롱(鳥籠)의 새같은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드러냈다면 덜 애잔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인생의 원초적 비애―유한한 삶―와 역사적 비애를 느끼게 하는 슬픈 비문이에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姥는 女(여자 녀)와 老(늙을 로)의 합자예요. 할머니라는 의미예요. 할미 모. 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乳姥(유모), 老姥(노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囑은 口(입 구)와 屬(이을 속)의 합자예요. 부탁한다는 의미예요. 口로 뜻을 나타냈어요. 屬은 음(속→촉)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와 상대가 연결되는 행위가 부탁이란 의미로요. 부탁할 촉. 囑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委囑(위촉), 囑望(촉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扣는 扌(손 수)와 口(입 구)의 합자예요. 두드리다란 의미예요. 扌로 뜻을, 口로 음을 표현했어요. 두드릴 구. 扣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打扣(타구, 치고 두드림), 扣琴(구금, 거문고를 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躊는 足(발 족)과 壽(목숨 수)의 합자예요. 머뭇거리다란 의미예요. 足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壽는 음(수→주)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壽는 ‘오래 살다’란 의미인데, 그같이 즉 오래도록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머뭇거리는 것이란 의미로요. 머뭇거릴 주. 躊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躊日(주일, 지난번), 躊躇躊躇(주저주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踟는 足(발 족)과 知(알지)의 합자예요. 머뭇거리다란 의미예요. 足으로 뜻을, 知로 음을 표현했어요. 머뭇거릴 지. 踟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踟躕(지주, 머뭇거림), 隨絲踟蛛(수사지주, 거미 줄 따르듯. 둘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蔚는(은) 艹(풀 초)와 尉(벼슬 위)의 합자예요. 제비쑥이란 의미예요. 艹로 뜻을, 尉로 음을 표현했어요. 제비쑥 위. 울창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의미예요. 제비쑥이 무성하다란 의미로요. 이때는 ‘울’로 읽어요. 빽빽할 울. 蔚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蔚山(울산, 지역명), 蔚蔚(울울, 무성한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縹는 糹(실 사)와 票(漂의 약자, 떠다닐 표)의 합자예요. 옥색(의 옷감)이란 의미예요. 糹로 뜻을 표현했어요. 票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떠다니는 가벼운 물체처럼 옅은 청백색이 옥색이란 의미로요. 옥색 표. 縹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縹緲(표묘, 끝없이 넓거나 멀어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렴풋함), 縹編(표편, 책가위를 옥색 빛깔의 천으로 엮었다는 뜻으로, 책을 이르는 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欽은 欠(모자랄 흠)과 金(쇠 금)의 합자예요. 공경한다는 의미예요. 欠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공경하는 것은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인지하는데서 나오는 행위란 의미로요. 金은 음(금→흠)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쇠처럼 진중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공경이란 의미로요. 공경할 흠. 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欽慕(흠모), 欽命(흠명, 황제가 내리는 명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베트남 후에의 유명한 관광지 한 곳으로 카이딘 황릉이 있어요. 10년이 걸려 완성된 능으로 황제 제위 중반기에 시작에 그의 사후에 완성되었다고 해요. 황릉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왕릉을 연상하기 쉽지만, 전혀 다른 모양으로, 얼핏 보면 무슨 기념관 같은 모양이에요. 이곳을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어요. ‘망해가는 나라의 황제가 무슨 능을 이렇게, 그것도 살아 생전에 지었단 말인가. 티엔무 사원에서 했던 ‘다짐’이 겨우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런데 그곳을 나오면서 생각을 달리 했어요. ‘이 역시 꼭두각시 황제가 치러야 했던 수모의 현장 아닐까? 그가 원했다기보다는 어쩔수 없는 반강요의 상태에서 지은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프랑스 당국이 장려한 황릉 공사를 통해 베트남 국민들에게 황제를 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아울러 황제를 위무하기 위해 조성한 것 아닌가 싶었던 거죠(왕조 국가 시대 왕들은 자신의 무덤 공사를 생전에 시작한 경우가 많이 있죠). 비문도 그랬지만 황릉도 비애감을 안겨주는—무덤 그 자체가 원래 비애감을 안겨주는 것이긴 하지만—슬픈 장소였어요.
여담 둘. 비문 해석이 완벽하지 못해요(특히 시 부분). 대의는 큰 차이 없을 것 같지만 미세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해 읽어 주셔요.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