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없어요!”

먹고 살기 바빠서

 

너무 바쁘고 복잡한 상황일 때와 뒤늦은 후회를 피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두 말의 공통점은 속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겠다. 빠르게 살면, 제정신에 못살고 후회하게 된다! 개인적 경험에 기댄 말이지만, 기업이나 사회로 환치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은일신월이(日新月異)’라고 읽는다. ‘날로 새롭고 달로 다르다란 뜻이다. 익히 알려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모 기업체 로비의 거울에 쓰여있는 문구인데, 사원들의 혁신 마인드를 북돋기 위해 써놓은 것 같았다. 문구를 보며, 기업의 생존이 빠른 변화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이기만 할까, 하는 기우(杞憂)를 살짝 해봤다.

 

가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도끼 근)(나무 목)(의 약자, 매울 신)의 합자이다. 나무를 베어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이다. 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한다. ‘새롭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새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땔감 신, 새 신.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新舊(신구), 新聞(신문) 등을 들 수 있겠다.

 

는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다르다기이하다라는 뜻을 나타냈다. 다를 이, 기이할 이.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異人(이인), 驚異(경이) 등을 들 수 있겠다.

 


목하 우리는 속도 전쟁 속에 살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혀 산다. 그런데 그 종착점은 과연 어떠할까? 분명 잘살아 보자고 한 것인데 외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역설적이게도 바쁘고 빠를수록 더더욱 자신개인이 될 수도 있고 기업이나 사회가 될 수도 있다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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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범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숨겨진 범인이 누구일까 궁금해 자꾸 책장을 넘기게 된다. 따라서 범인을 알고 있는 추리소설은 재독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감춘다는 것은 신비감을 간직하는 것이고, 그 신비감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매력이 된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본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밀로의 비너스상'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그림 자체가 훌륭하고 조각 솜씨가 뛰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감출 곳을 적당히 감췄기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감출 곳을 다 드러낸 '비너스의 탄생'이나 '밀로의 비너스상'은 처음에는 눈길이 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감은 반감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여성분들이 이 부분을 읽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하며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한시에는 당시풍과 송시풍이라는 두 작풍(作風)이 있다. 당나라에서 지어진 시를 당시라 하고 송나라에서 지어진 시를 송시라 하는데 두 시대의 작풍은 차이가 분명했고, 이후 이런 작풍을 따라 지은 시들을 당시풍 혹은 송시풍이라 했다. 당시풍은 정()을 중심으로 하고, 송시풍은 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사물을 접할 때 정과 의가 함께 일어나지만, 당시풍은 정에 더 중점을 두고 짓고, 송시풍은 의에 더 중점을 두고 짓는다. 그러다 보니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시작법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정에 기반한 당시풍은 대상에서 느끼는 미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정을 사물의 묘사 속에 감추어 놓는 작법을 택한다. 미묘한 감정은 드러내어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하는 순간 미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의에 기반한 송시풍은 대상에서 느낀 생각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경물은 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수적(극단적으로 말하면) 재료로 사용한다.

 

사진은 소식(蘇軾, 1036-1101)제서림벽(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이란 시이다. (서림사에 있는 작품인데, 글씨는 소식이 쓴 것이 아니고 이 절의 스님이 쓴 것이다. 현대 작품이다.)

 


橫看成嶺側成峰 횡간성령측성봉    가로로 보면 산줄기 세로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까움높고 낮음에 따라 제각각

不識廬山眞面目 불식려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 알지 못함은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이 몸 산 속에 있기 때문

 


이 시는 시인의 그 어떤 생각을 여산(廬山)의 모습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그 어떤 생각은 무엇일까?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시인이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며, 이런 차별적 파악은 궁극의 이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의 이치를 체득할 때라야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소재로 등장한 여산(서림사에서 바라 본)은 시인의 이런 생각을 촉발시킨 것이지만, 정작 여기에서 중심이 된 것은 여산이 아니고 시인의 생각이다. 여산은 시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전형적인 송시풍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을 해본다. 당시가 맛있을까, 송시가 맛있을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을 왜 하냐고 할 것 같다. 그렇다.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당연히 당시가 맛있다. 시인의 미감을 사물의 묘사 속에 숨겨 놓았기에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궁금증을 가지고 자꾸 읽게 되기 때문이다. 숨겨 놓은 범인이 궁금해 계속 추리소설을 읽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송시는 어떨까? 그렇다. 이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기에 별맛이 없다. 범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소식의제서림벽은 서림사를 소재로 한 시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로 꼽힌다. 그래서 그런지 찬양 일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저 소식이라는 유명 문인이 지었다는 것 빼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시이다.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반론을 할 것 같다. 그럼, 송시풍의 시는 다 보잘것없다는 것이냐?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송시풍의 시는 시를 통해 교화를 이루려는 동양의 전통 문학론에 충실한 시이다. 결코 허투루 볼 시풍의 시가 아니다. 다만 도덕적인(철리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당시에 비해 미감이 떨어지고 맛이 우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뿐이다.

 

여담. 당시풍이나 송시풍은 시대의 사상 조류와 관련이 깊다. 당대는 불교(선종)가 성했던 시기이고, 송대는 도학(성리학)이 성했던 시기이다. 당시가 불필요한 사설을 배제하고 경물 묘사에 치중하고, 송시가 사설을 앞세우고 경물을 뒤에 놓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는 한시에서 꽃에, 송시는 열매에 비유되기도 한다. 당 이전 송 이후 시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두 시풍이 한시의 모든 것을 발화시켰고 결실을 맺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풍으로 지은 시서림사에서 바라본 여산의 풍경 를 위 소식의 시와 나란히 소개하면 좋았을 터이다. 당시풍과 송시풍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아쉽게도 그만한 시를 찾지 못했다. 과문(寡聞)한 탓이다.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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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千山鳥飛絶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 끊어졌네          萬徑人蹤滅

외로운 배 삿갓 쓴 늙은이                     孤舟簑笠翁

눈 내리는 차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         獨釣寒江雪


<유종원, 강설(江雪)>



동아시아엔 신이 없다. 굳이 있다면 자연이 신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정신의 최고 경지를 자연과의 합일에 둔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 만물일여가 이런 경지이다.


위 시는 서경시로 볼수도 있지만 서경을 빈 서정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절대 적막의 공간(1, 2구). 이 절대 적막의 공간에 등장한 유일한 동적 존재인 노인. 그러나 이 노인 역시 낚시대만 드리운 채 미동도 하고 있지 않다(3, 4구).  노인은 절대 적막의 공간과 합일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물아일체, 만물일여의 상태인 것이다.


시에 등장한 노인은 당연히 작가 자신일 터이다. 이 시를 흔히 유종원의 정치적 고립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시로 보지만, 그보다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여준 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를 지을 당시, 그는 이미 그런 이해득실의 현실적 가치를 넘어선 경지에 있었다고 보인다.


폭설이 내린 아침, 눈을 치우기 앞서 잠시 한가한 사색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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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로 이루어진 한시[절구]를 지을 적에는 대개 전환 부분에 해당하는 3구와 결말에 해당하는 4구를 먼저 짓고 도입과 전개에 해당하는 1, 2구를 나중에 짓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작시 순서와 다르다. 3, 4구를 먼저 짓고 1, 2구를 나중에 짓는 것은 이렇게 지어야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작하면 용두사미의 시가 되기 십상이다. 물론 이는 주로 초심자에게 해당하는 작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한시에 숙달한 이들도 이 방법을 선호한다. 실패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정초에 일출 장소를 찾기 보다는 일몰 장소를 찾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시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을 먼저 생각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면 용두사미같은 한 해가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몰을 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면 과한 희망을 덜고 좀 더 알찬 한 해를 보낼 것 같다.


사진은 '동암(東庵)' 이라고 읽는다(낙관 부분은 '임자년 사월 팔일 성지용 서(壬子年 四月 八日 成志鏞 書)'라고 읽는다). '동쪽에 있는 암자'란 뜻인데, 달리 풀이하면 '해맞이 암자' 혹은 '진리의 암자(진리의 깨우침을 해맞이에 비유)'라고도 할 수 있다. 도비산(서산시 부석면 소재)에 있는 암자인데 해맞이에 좋은 장소에 위치해 이런 이름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일요일(3일) 오후에 이곳을 찾았다. 해돋이 대신 해넘이에 가까운 풍경을 보며 새로운 한 해를 생각했다. 더불어 '공수거(空手去)'라는 인생의 종착점을 떠올리며 삶도 생각해봤다. 끝에서 시작을 생각하면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좀 더 완결성있게 한 해를 보내고 삶도 그렇게 살 것 같다.





庵이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庵은 广(집 엄)과 奄(가릴 엄)의 합자이다. 풀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이란 뜻이다. 암자 암. 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庵子(암자)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동암(東庵)은 이 암자가 있는 도비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 영주시의 부석서와 동일한 이름이다. 의상대사 전설도 똑같다)와 살림 살이가 정반대이다. 물론 '암'과 '사'의 차이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같은 종단에 속한 절인 것을 생각하면 안쓰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왠지 이곳이 더 수도자의 집다운 느낌이 든다. 퇴락한 절이라야 수도자의 집같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지만, 왠지 부화한 절에는 수도자다운 수도자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속세와 절연하고 삶의 종착역을 우선시하는 수도자가 부화한 집에 머문다는 것은 왠지 모순된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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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잔 흙들을 가리지 않기에 그 거대함을 이룬 것이고, 황하와 바다는 잔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 깊음을 이룬 것입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이사(李斯)는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이사 같은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의 입지가 점차 넓어지자 토착 세력들이 불안감을 느껴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왕이었던 정(, 뒷날의 시황제)을 충동질하여 이들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객령(逐客令)’을 내리게 했다. 막막해진 이사는 외국에서 와 진나라에서 벼슬하는 이들의 가치와 의미를 설득력 있게 진술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를 올려 진왕의 회심을 기대했다. 설득력 있는 진술이 통했는지 진왕은 축객령을 철회한다. 인용문은 상진왕축객서에서도 백미 부분에 해당하는 문구로, 널리 회자(膾炙)되는 문구이다. 이사의 저 문구는 강자에 기대는 약자의 읍소(泣訴)’이다.

 

그런데 저 문구를 약자의 관점이 아닌 강자의 관점에서 보면 약자의 읍소를 수용하는 강자의 여유가 된다. 수용이란 강자의 여유에서 나온다. 당시 진나라가 이런 강자의 여유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이사가 설득력 있는 논변을 펼쳤다 해도 그 말은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의 한자는 정초(定礎)’라고 읽는다. 정초란 건물의 기초를 잡아 정한다는 뜻으로, 공사 착수를 기념하는 문구이다. 사진의 정초 글씨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글씨로, 한국은행 옛 본점(현 화폐박물관) 머릿돌에 새겨진 글씨이다. 이 글씨를 쓴 이에 대한 논구(論究)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이토의 글씨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 정초’ 글씨에 대한 처리가 대두됐는데, 안내판 설치 혹은 삭제나 가리기 또는 교체 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전 같으면 당연히 교체나 삭제 혹은 가리기에 손을 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안내판 설치가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족적 자존심도 없냐며, 펄쩍 뛰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안내판 설치에 손을 드는 건 강자의 여유 관점에서 보고자 해서이다. 저런 자잘한(?) 흔적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에 하등 지장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려 저런 것조차 수용할 때 우리의 자존심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자잘한 흙이나 자잘한 물줄기를 기꺼이 수용하여 거대한 산이 되고 거대한 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한때 국권을 잃어 저런 씁쓸한 흔적물을 갖게 되었지.’ 정도의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싶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통치를 받아 그 잔존물이 많다. 한때는 베트남도 그런 잔존물을 제거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다낭의 바나힐도 그중의 하나이다. 식민지 관리들의 휴양시설이었던 것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은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베트남처럼 자존심 강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세계 최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을 이긴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들이 식민지 시절의 잔존물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이다. 그따위 잔존물이 그들의 자존심을 해할만한 꺼리가 못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태산과 하해는 자잘한 흙덩이와 물줄기를 기꺼이 품는다. 강자의 여유인 것이다. 이토의 저 하찮은 글씨가 뭐 그리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인가! 그저 일소(一笑)에 붙이고 관람하는 것이 되려 자존심 높은 행동이 아닐까? 관계 기관의 현명한 판단이 있겠지만, 강자의 여유 관점에서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집 면)(바를 정)의 합자이다. 집을 바르게 지어 붕괴의 염려가 없기에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정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안정되려면 사태가 결정돼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정할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確定(확정), 定石(정석) 등을 들 수 있겠다.

 

(돌 석)(아플 초)의 합자이다. 기둥 떠받치는 고통을 감내하는 돌이란 뜻이다. 주춧돌 초.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礎石(초석), 基礎(기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군산에 옛 일본식 가옥을 관광하는 코스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코스를 가보게 됐는데, 안내하는 이가 이제 이런 가옥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식 가옥을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보존하다니, 라며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강자의 여유 관점으로 대하면 어떨까 싶다. 그까짓 일본식 가옥 남아있는 것이 무어 그리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첫머리 인용문을 음미해보자. “태산은 잔 흙들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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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내판을 설치하고 보존하자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찔레꽃 2021-01-02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그래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