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은 잔 흙들을 가리지 않기에 그 거대함을 이룬 것이고, 황하와 바다는 잔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 깊음을 이룬 것입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이사(李斯)는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이사 같은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의 입지가 점차 넓어지자 토착 세력들이 불안감을 느껴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왕이었던 정(, 뒷날의 시황제)을 충동질하여 이들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객령(逐客令)’을 내리게 했다. 막막해진 이사는 외국에서 와 진나라에서 벼슬하는 이들의 가치와 의미를 설득력 있게 진술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를 올려 진왕의 회심을 기대했다. 설득력 있는 진술이 통했는지 진왕은 축객령을 철회한다. 인용문은 상진왕축객서에서도 백미 부분에 해당하는 문구로, 널리 회자(膾炙)되는 문구이다. 이사의 저 문구는 강자에 기대는 약자의 읍소(泣訴)’이다.

 

그런데 저 문구를 약자의 관점이 아닌 강자의 관점에서 보면 약자의 읍소를 수용하는 강자의 여유가 된다. 수용이란 강자의 여유에서 나온다. 당시 진나라가 이런 강자의 여유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이사가 설득력 있는 논변을 펼쳤다 해도 그 말은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의 한자는 정초(定礎)’라고 읽는다. 정초란 건물의 기초를 잡아 정한다는 뜻으로, 공사 착수를 기념하는 문구이다. 사진의 정초 글씨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글씨로, 한국은행 옛 본점(현 화폐박물관) 머릿돌에 새겨진 글씨이다. 이 글씨를 쓴 이에 대한 논구(論究)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이토의 글씨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 정초’ 글씨에 대한 처리가 대두됐는데, 안내판 설치 혹은 삭제나 가리기 또는 교체 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전 같으면 당연히 교체나 삭제 혹은 가리기에 손을 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안내판 설치가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족적 자존심도 없냐며, 펄쩍 뛰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안내판 설치에 손을 드는 건 강자의 여유 관점에서 보고자 해서이다. 저런 자잘한(?) 흔적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에 하등 지장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려 저런 것조차 수용할 때 우리의 자존심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자잘한 흙이나 자잘한 물줄기를 기꺼이 수용하여 거대한 산이 되고 거대한 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한때 국권을 잃어 저런 씁쓸한 흔적물을 갖게 되었지.’ 정도의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싶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통치를 받아 그 잔존물이 많다. 한때는 베트남도 그런 잔존물을 제거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다낭의 바나힐도 그중의 하나이다. 식민지 관리들의 휴양시설이었던 것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은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베트남처럼 자존심 강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세계 최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을 이긴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들이 식민지 시절의 잔존물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이다. 그따위 잔존물이 그들의 자존심을 해할만한 꺼리가 못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태산과 하해는 자잘한 흙덩이와 물줄기를 기꺼이 품는다. 강자의 여유인 것이다. 이토의 저 하찮은 글씨가 뭐 그리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인가! 그저 일소(一笑)에 붙이고 관람하는 것이 되려 자존심 높은 행동이 아닐까? 관계 기관의 현명한 판단이 있겠지만, 강자의 여유 관점에서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집 면)(바를 정)의 합자이다. 집을 바르게 지어 붕괴의 염려가 없기에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정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안정되려면 사태가 결정돼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정할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確定(확정), 定石(정석) 등을 들 수 있겠다.

 

(돌 석)(아플 초)의 합자이다. 기둥 떠받치는 고통을 감내하는 돌이란 뜻이다. 주춧돌 초.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礎石(초석), 基礎(기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군산에 옛 일본식 가옥을 관광하는 코스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코스를 가보게 됐는데, 안내하는 이가 이제 이런 가옥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식 가옥을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보존하다니, 라며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강자의 여유 관점으로 대하면 어떨까 싶다. 그까짓 일본식 가옥 남아있는 것이 무어 그리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첫머리 인용문을 음미해보자. “태산은 잔 흙들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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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내판을 설치하고 보존하자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찔레꽃 2021-01-02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그래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