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구로 이루어진 한시[절구]를 지을 적에는 대개 전환 부분에 해당하는 3구와 결말에 해당하는 4구를 먼저 짓고 도입과 전개에 해당하는 1, 2구를 나중에 짓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작시 순서와 다르다. 3, 4구를 먼저 짓고 1, 2구를 나중에 짓는 것은 이렇게 지어야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작하면 용두사미의 시가 되기 십상이다. 물론 이는 주로 초심자에게 해당하는 작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한시에 숙달한 이들도 이 방법을 선호한다. 실패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정초에 일출 장소를 찾기 보다는 일몰 장소를 찾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시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을 먼저 생각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면 용두사미같은 한 해가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몰을 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면 과한 희망을 덜고 좀 더 알찬 한 해를 보낼 것 같다.


사진은 '동암(東庵)' 이라고 읽는다(낙관 부분은 '임자년 사월 팔일 성지용 서(壬子年 四月 八日 成志鏞 書)'라고 읽는다). '동쪽에 있는 암자'란 뜻인데, 달리 풀이하면 '해맞이 암자' 혹은 '진리의 암자(진리의 깨우침을 해맞이에 비유)'라고도 할 수 있다. 도비산(서산시 부석면 소재)에 있는 암자인데 해맞이에 좋은 장소에 위치해 이런 이름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일요일(3일) 오후에 이곳을 찾았다. 해돋이 대신 해넘이에 가까운 풍경을 보며 새로운 한 해를 생각했다. 더불어 '공수거(空手去)'라는 인생의 종착점을 떠올리며 삶도 생각해봤다. 끝에서 시작을 생각하면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좀 더 완결성있게 한 해를 보내고 삶도 그렇게 살 것 같다.





庵이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庵은 广(집 엄)과 奄(가릴 엄)의 합자이다. 풀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이란 뜻이다. 암자 암. 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庵子(암자)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동암(東庵)은 이 암자가 있는 도비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 영주시의 부석서와 동일한 이름이다. 의상대사 전설도 똑같다)와 살림 살이가 정반대이다. 물론 '암'과 '사'의 차이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같은 종단에 속한 절인 것을 생각하면 안쓰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왠지 이곳이 더 수도자의 집다운 느낌이 든다. 퇴락한 절이라야 수도자의 집같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지만, 왠지 부화한 절에는 수도자다운 수도자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속세와 절연하고 삶의 종착역을 우선시하는 수도자가 부화한 집에 머문다는 것은 왠지 모순된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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