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학의 철학 ㅣ 대우학술총서 신간 - 과학/기술(번역) 543
힐러리 퍼트넘 외 엮음, 박세희 옮김 / 아카넷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부차적인> 단점은 실린 글들의 높은 수준으로 인한 어려움이다. 저자들 이름만 일별하여도 알 수 있듯 현대 수학 및 철학계에서 기라성 같았던 학자들이 쓴 수준 높은 글들로 구성된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책이다. 수학철학에 관한 국내문헌이 희소한 실정에서, 이 분야에 관심하지만 원문이나 학술논문을 통한 전문적인 접근이 어려운 나 같은 일반 독자층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수학철학뿐만 아니라 철학 및 수학 일반에 대한 적당량의 사전지식이 없이는 읽기가 아예 불가능할 만큼 어렵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도전해보고 싶은 지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끈기 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탁월한 글들임은 분명하다. 이해하기 어려워 읽어나가는 게 괴롭고 힘들어도, 조금이나마 이해했을 때의 충격과 신선함이 가져다주는 지적 희열을 느낀 적이 참 많았다.
유일한 <주된> 단점은 매우 좋지 못한 번역이다. 직역을 원칙삼아 모든 글들을 번역하였다는 역자 후기가 증거하듯이 한국어로 읽기에 아주 좋지 못한 문장들로 번역되었다. 원체도 어려운 글들을 직역투의 번역이 더욱 읽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단순한 직역의 문제를 떠나, 개별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점 역시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역자가 수학자이다보니 대부분의 용어들을 수학계의 번역용례에 따라 번역하였다고는 하는데, ‘quantifier’를 ‘양화사’가 아닌 ‘한정사’라고 번역한 것은 철학계와 수학계에서의 번역관행이 다른 탓이든가 것도 아니면 번역이 오래된 탓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양상성이 논의되는 맥락에서 ‘is necessary’를 ‘필연적이다’가 아닌 ‘필요하다’로 번역한다든가, 러셀의 논리원자론이 언급되는 맥락에서 ‘universal’을 ‘보편자’가 아닌 ‘보편세계’로 번역하는 등의 사례는, 명백한 오역이자 연관분야의 번역용례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증거이다. 다만 동정적으로 이해하자면, 역자는 이 책의 번역에 15년을 매달렸다고 하니, 번역상의 단점은 양질의 책을 하루라도 빨리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고 싶었던 학자적 욕심에서 불가피했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점을 역자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각 쪽별로 문제될 만한 용어들에 대한 원어와 약간의 해설이 역자 주에 추가되어있다. 미심쩍은 단어나 문장에 대해서는 이 부분을 반드시 참고해가며 읽어야 한다) 이 판본을 기반삼아 좀 더 읽기 수월한 번역판이 차후에라도 출판되길 바라본다.
상대적으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글들, 혹은 이해하긴 어려워도 개인적으로 흥미롭거나 인상 깊었던 글들에 대한 개별적인 리뷰들을 추가해본다. (순서는 책 내 배치순)
1. R. 카르납, ‘수학의 논리주의적 기초’(‘수학기초론 심포지엄’ 중 1)
논리주의의 기본 프로그램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는 글이다. 카르납의 1차 저술을 읽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그가 글을 매우 잘 구성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여 효율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소양을 지닌 학자라고 생각했다. 논리주의의 기본 프로그램을 간결하고 압축적이면서도 실속 있게 설명한 뒤, 약간의 문제점 및 그에 대한 개인적인 해결책과 논평도 첨언하는바,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밀도와 균형을 갖춰 전달하고 있는 좋은 글이다. 논리주의에 관심하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할 만하다.
2. M. 더밋, ‘직관주의 논리의 철학적 근거’
더밋의 글이 원체가 어렵다는데 번역이 이를 더욱 읽기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저자가 자신의 기본 논지를 일관된 흐름으로 꿰뚫고 있기에 끈기 있게 읽으면 다소의 소득이 있는 글이다. 책 내에서 이 글보다 앞서 배치된 브라우어의 글들에 비해 좀 더 순수철학(언어철학, 논리철학,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직관주의 논리체계에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철학의 해당 분야들에 대한 상당량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더밋의 반실재론이 항상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가 왜 반실재론적 노선을 천착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수학을 배울 때 우리가 진정 배우는 것은, 어떤 수학적 명제가 단순히 참인지 여부에 관한 정태적 지식이 아니라, 형식화된 연산체계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증명되고 도출될 수 있는지에 관한 <구성적 절차와 방법>이라는 논제가 매우 인상 깊었다. 길고 어렵지만 반복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설득력과 호소력을 갖춘 글이다.
3. B. 러셀, ‘수리철학 입문으로부터의 발췌’
1의 카르납의 글처럼, 하지만 그의 글보다 조금 더 상세히, 논리주의를 명료하고 평이하게 해설하고 있다. 카르납의 글에서 글이 참 잘 구성되었다 정도의 인상을 받았다면, 이 글에서는 전반적으로 참 잘 쓴 글이다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필요에 따른 간결한 개념정의, 개념이나 논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적절한 예시, 핵심 논제를 향한 명료한 논증적 구성 등을 고루 갖춘바, 소위 잘 읽히는 글이라 생각한다. 절판된 “수리철학 입문”을 중고로 사서 책 전체를 온전히 읽고 싶어지게 만들 만큼 탁월하다. 카르납의 글을 읽은 뒤(그리고 여유가 되면 프레게의 글과 5에서 후술될 헴펠의 글도 읽은 뒤) 이 글을 읽으면 논리주의의 기본 윤곽을 다소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납의 글처럼 논리주의에 관심하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될 만하다.
4. D. 힐버트, ‘무한에 관하여’
그 유명한 “그 누구도 칸토어가 보여준 낙원으로부터 우리를 추방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글이다. 형식주의의 기본 논제 및 그 프로그램의 골격을, 무한개념에 관한 논의를 중심삼아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다. 형식주의의 비조이니만큼 이 사조의 핵심기조를 잘 소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5. R. 카르납,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
수, 집합, 명제 등 철학에서 소위 ‘추상적 실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경험주의적, 의미론적, 존재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일관되게 다룰 수 있는지 고찰하고 있다. 논의과정에서 카르납의 유명한 내적/외적 물음 구분 및 그에 기반을 둔 소위 관용의 원리가 상세히 개진된다. 수학 및 자연과학의 학문적 지위와 유의미성을 일관되게 근거 짓고자 하였던 논리실증주의풍의 철학적 노력이 돋보인다. 수학철학보다는 언어철학적 논의가 중심적이긴 하지만, 철학사적으로 중요하고도 유명한 글이기에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6. P. 베나세랍, ‘수가 될 수 없는 것
개인적으로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글이었다. 초두의 의미심장한 인용문과 가상적인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도대체 무슨 주장을 하려고 이토록 뜸을 들이는가 궁금하게 만드는 많은 논의들을 거친 뒤, 마지막에 이르러 앞선 고찰들을 회고하고 논평하면서 본인의 핵심 주장을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게 개진한다. 수학철학이라는 무미건조한 주제에 관해서도 이토록 인상적이고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수 개념에 대한 전체론적 관점이 두드러지는데, 콰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콰인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관점인지는, 철학사적 지식이 부족하여 분명히 알고 있지 못하다. 분명한 것은 베라세랍의 관점이 콰인의 실용주의적 논리주의보다는, 비-수학적 측면에서는 덜 극단적이고 수학적 측면에서는 강한 관점인바, 수열 개념 고유의 회귀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구조주의적 관점에 동의하든 안 하든, 반복해서 읽을 가치가 있는 명문이다.
7. A. J. 에이어, ‘선험적인 것’: C. G 헴펠, ‘규약에 의한 진리’
논리실증주의와 가까웠던 두 인물인 만큼 두 글의 논지와 성격이 다소 겹치기에, 함께 묶어서 읽는 편이 유용하다. 필연성, 선험성을 분석성 개념으로 환원하여 그것을 언어적 규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규약주의적 관점 및, 그에 따른 논리와 수학에 대한 규약주의적 관점을 잘 소개하고 있다. 각 글만의 독자적인 장점도 있다: 에이어의 글은, 현대적인 분석성 개념을 규약주의적 관점에서 천착함으로써, 수학 및 논리학의 필연성, 확실성을 경험주의적 테두리 내에서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논증해낸다. (물론 그의 논증이 정당화되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헴펠의 글은, 편집자 서론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페아노 공리계에 기초하여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논리주의 기획을 평이한 문체로 단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수학과 논리학의 성격을 에이어와 마찬가지로 규약주의적인 분석성 개념을 활용하여 정의한다. 논리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입문 격의 해설로서 매우 추천될 만하다. (다만 러셀의 역설로 인해 촉발된 문제를 심도 있게 고찰하지는 않고 넘어가기에, 논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다소 결여되어있다고 하겠다)
8. G. 불로스, ‘집합의 축차적 구상’
현대적 집합론의 기초적인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칸토어의 집합개념 및 그에 기반을 둔 소박한 집합론의 공리계, 소박한 집합론에서 발견된 러셀의 역리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집합의 축차적(회귀적, 반복적(iterative)) 구상 및 유형이론(글에서는 ‘단계이론(stage theory)’이라 칭해진다), 역설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기획으로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공리계 등ㅡ현대 수학철학의 다양한 논의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기에 필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집합론 관련 사항들이, 명료하고 간결한 서술을 통해 차근차근 개진된다. 글이 어려워서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집합론과 연관된 각종 개념정의나 공리들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이나마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읽는 소득이 많다. 논의과정에서 형식적인 논리식들이 지속적으로 튀어나오기에, 글을 조금이라도 더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2계 술어논리에 대한 다소간의 지식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추가적으로 이 글보다 한 글 넘어 책에서 맨 마지막에 실린 H. 왕의 ‘집합의 개념’ 중 1절 ‘(극대)축차적 개념’을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불로스의 글은 상당히 형식적이게 전개되다보니, 생소하여 어렵게 느껴지거나 논리식들에 정신이 팔려 논의 전체의 벼리와 맥락을 짚기 어려운 편이다. 반면 왕의 글에서 해당 절은 불로스의 글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논리식 없이 자연언어로 비교적 평이하게 해설하고 있다. 불로스의 글을 읽은 뒤 그 내용들을 되새겨가며 이 부분을 읽다 보면, 불로스의 글에서 나온 내용들이 이런 의미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집합의 회귀적 구상개념의 얼개에 대해 더욱 명확하고 풍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족1: 별점 세 개를 준 것은, 어려우면서도 양질인 글들이 수록되었기에 4점을 주고 싶은 반면, 번역이 좋지 않아 2점을 주고 싶기도 하였기에, 그 중간선인 3점에서 타협한 결과이다. 복수의 글들을 모은 이런 책에 단일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기실 그다지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절판된 책인 마당에, 나처럼 중고책을 비싼 값에 주고 사고자 마음먹은 사람을 위해서도, 도서관에서 빌려 선별적으로 읽으려는 사람을 위해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리뷰를 작성하고자 그저 그런 3점을 매겨놓고는 이 같은 장황한 리뷰를 남겨보았다.
사족2: 선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교양수학, 순수수학, 논리학, 수학철학, 분석철학, 철학일반 관련 책들을 모조리 곁에 두고는, 이 책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그런 책들을 병행하여 활용하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물러앉아 편하게 읽을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다른 책들도 뒤적여보고 책이나 노트에 메모도 해보고 논리식의 도출과정을 계산해보기도 하면서, 글 한 편 한 문단 한 단어씩 끈기 있게 읽어야 일말의 소득을 거둘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번역이 좋지 않다 하여 혹은 너무 어렵다 하여, 읽다가 포기하거나 겉핥기식으로 대충 읽어나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