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0년 경 Russell은 명제가 불완전 기호로서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 온전한 의미를 얻는 데에는 특정 맥락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 명제룰 그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그 맥락이란 바로 판단 내지 믿음이다. 이것이 명제이론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사안이 바로 판단이론인 이유이다. (...) 이러한 접근[Russell의 다중관계 판단론]은  그를 고무시켰던 최초의 철학적 목적과 상충한다. 이런 식의 판단론은 심리주의적 의미론에 굴복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Russell의 본디 프로젝트는 논리적 내지 의미론적인 영역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 기획에 착수하는 전략은 우리가 믿거나 아는 영역이 인간의 마음과는 특정한 방식으로 독립적이라는 기본적인 직관, 두 명의 사람이 (심지어 거짓된 것일지라도) 동일한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직관, 추론이나 귀결 등의 논리적 관계들이 그것들을 판단하는 마음에 대한 지시 없이도 분석될 수 있을 것이라는(그리고 그렇게 분석되어야만 한다는) 직관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이 기획의 핵심 이설은 우리가 말하는 것들의 본성 및 그것들 간의 관계가, 누가 그것을 말하는지 말할 예정인지 그에 대해 어떤 명제적 태도를 취하는지 여부와는 독립적이라는 것이었다. / Russell의 새로우누명재이론이 옳은 것이라면, 이 기획은 헛된 소망일 뿐이다. 논리학은 임의의 명제들 간 성립하는 추론적 관계를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기껏해야 실지로 이뤄지거나 이뤄질 수 있는 판단의 내용들 간 추론적 관계를 다루는 분야로 여겨지게 된다. 어떤 명제는 선험적이고 다른 명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혹여 그에 적절한 의의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판단의 속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관념론자들이 줄기차게 옹호해온 생각이다. 판단하는 정신이 없다면 세계에는 참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다. (...) ...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특정 명제적 태도를 취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논리학이 유의미해진다는 결론은 불가피하다. (...) 1910년 경의 Russell은, Brentano가 오스트리아 실재론 전통의 철학적 가두행진을 개시하였던 심리주의적 단계로 완전히 회귀하는 방향으로 이끌린 셈이다.

A. Coffa, The Semantic Tradition ..., 144-6쪽


2. 하지만 명제태도 맥락에 대한 수다한 의미론적, 심리철학적 분석을 통해 언어철학이 심리철학으로 거의 흡수되는 단계를 거친 시대에 사는 작금의 우리가 보기에, 저 당시의 러셀은 단순히 심리주의로 회귀했다고 말해지기보다는 심리철학적 의미론의 영역을 선취했다고 말해져서는 안되는가? 수학과 논리학이 형식에만 관계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형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명확히 특징화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직접대면 원리와 공리적 직관을 만지작거렸던 러셀은, 우리가 말하고 믿고 판단하고 의미하는 영역에서도 형식적으로 투명한 의미론을 추구하는 한편 심리적 요소들이 개입되어있을 수밖에 없음을 마은 란 켠에서 직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러셀이 시간을 건너뛰어 20세기 후반기에 이뤄진 수다한 언어철학적 심리철학적 논쟁들과 심지어 명제태도 및 그 내용을 자연화하려는 철학적 시도를 목도하게 된다면, 비트의 힐난일랑 무릅쓰고 ˝지식론˝의 출판을 진지하게 재고해볼 여지를 발견해내지 않았을까? 작금의 분석철학자들이 자꾸 대륙의 현상학 전통이나 논리학 및 수학에 대한 초기 심리주의적 전통과 접점을 찾으려하게 된 경향을, 러셀은 은연중에 먼저 보여주게 된 게 아닐까? 논리학이든 의미론이든 여하간 물리세계에 살아가는 인간이 이해하고 인간이 그 이해를 현시하는 분야가 아니겠는가? 의미 개념과 참 개념을 그리도 멋없는 앙상한 모양새로 만들어놓은 콰인이 적잖은 논의주제에서 러셀의 분석기조를 따랐다는 건, 단순히 철학적인 방법론상의 편의성에서 따라온 우연한 결과는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추론하는 것, 우리가 의미하는 것의 토대를 마음에서 찾는 작업에 붙는 이름은, 철지나 먼지 앉은 19세기 말의 심리주의로 칭해질 게 아니라 한 세기 이후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자연주의적 의미론으로 칭해져야 (역사적으로) 좀 더 온당하지 않을까?

3. 설사 2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다‘라 하더라도 유보조건은 있겠다. 이는 마치 고대의 원자론자들이 원자론적 자연관을 선취했다 해서, 현대 이론물리학자들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이론적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논구하지는 않는 이유와도 상통하는 유보조건일 것이라. 그저 범인들이 할 바는 데모크리토스와 러셀의 통찰력에 감탄하는 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를 열심히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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