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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ㅣ 케니의 서양철학사 1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08년 6월
평점 :
여타 철학사 책들과는 판이한 고유의 특색들로 인해, 읽는 읽는 재미와 지적인 소득 양 측면에서 만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를 읽는 역량도 기를 수 있게 해주는 양질의 철학사 서적이다. 우선 저자와 역자 모두 언급하듯 역사적 서술과 철학의 하위 분야별 내지 주제별 서술을 병행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초심자는 전자 파트에서 흥미를 키우며 철학사적 맥락에 대한 전반적인 감각을 갖춘 뒤, 곧바로 후자 파트에서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들을 통해 앞서 스케치한 밑그림에 살을 붙여가며 철학사의 윤곽을 나름대로 선명하게 꼴지을 수 있다. (다만 후자 파트에서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확 뛴다는 점은 감내해야겠다.) 철학사나 철학의 하위분야에 익숙한 독자층의 경우엔 단편적으로만 알던 사안들을 논증적으로 맥락화하면서, 본인이 기존에 그려냈던 철학사의 그림에서 흐릿하거나 미덥지 못했던 부분을 간결한 호흡으로 명확하고 탄탄하게 갈무리할 기회가 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느낀바 분석철학적 프리즘을 곁들여 전통철학사를 논증적으로 해설 및 재구한다는 점도 읽는 흥미와 효용을 높여주는 특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타 철학사 책들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그 내부에서 최대한 정통적이고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에 치중하거나, 반대로 철학사적 흐름에서 비교적 굵직한 맥락들만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데에 역점을 두거나, 이론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 사이에서 균형을 찾다보니 결국 두 측면 모두에서 깊이감이나 생동감이 탈각된 무미건조하고 백과사전적인 사안들을 나열하는 식이 되기 쉽다. 첫 번째 경우는 초심자든 숙달자든 읽는 피로도가 높아 흥미를 지레 꺾어버리고, 두 번째는 철학적 읽기 훈련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세 번째 경우는 단편적인 명제적 지식만 늘어날 뿐 철학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맥락적인 이해를 얻게 해주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케니는 상기한 특색을 통해 일단 이론 맥락과 역사 맥락 간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분야별, 주제별 서술 파트에서 전통철학자들의 관점을 자구적으로만 심화, 확장시키는 게 아니라 다소 분석철학적 스타일에 따라 논증적으로 재구성하면서 해설 및 평가한다. 이를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전통철학자들의 사유를 우호적으로든 비판적으로든 우리 사유의 피부에 와닿게끔 유의미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지점들을 지속적으로 짚어주기에, 고대철학을 <지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사유의 화석>으로서가 아니라 <고대인의 입장에서 이론적이고 정합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사유의 호흡>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번역어와 개념 간 관계 문제를 자주 언급한다는 점도 분석철학적 특색이 가미된 부분으로서 이러한 장점에 기여한다고 여겨졌다.
여하간 전반적으로 책 고유의 특성이 철학사 서적으로서 지닐 수 있는 단점은 보완하고 철학적 텍스트로서 읽는 재미를 높여준다고 느낀 독서였다. 번역의 경우 일단 전반적으로는 분명 나쁘지 않은 스타일이다. 하지만 한국어 문장으로서는 어색한 어절배치가 종종 눈에 띄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사소하지 않은 형태의(즉 내용 이해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식의) 오식 내지 오역이 의심되는 부분도 간혹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가령 235쪽 첫째 문단의 "왜냐하면 '만일 p라면, 그렇다면 q이다'는 더 이상 논리적 법칙이 아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에서 두 번째 문장변항은 q가 아니라 p여야 한다. 'p→q'는 당연히 논리적 참이 아니고, 이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들어지는 예시도 '만일 내가 앉아 있다면 나는 앉아 있는다'이다. 이런 식으로 쌩 입문자라면 오식인지 여부를 의심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나보다 짐작하며 내용을 이해 못한 채 넘어가게 만들기 쉬운 미묘한 맥락에서의 오식이 간혹 보인다. (외려 원저자가 실수한 사안을 역자가 나름대로 검증하여 고쳐낸 부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전술했듯 전반적으로는 매끄러운 번역이고 의심스런 부분의 출현 빈도가 독서흐름을 방해할 만큼 높지는 않기에, 입문자든 숙달자든 철학사를 정리해보고 싶은 누구에게든 일독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