緖論

 

20세기 이후 서양철학은 명백히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하였으며, 암암리에는 더욱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고 할 수 있다. 소위 언어적 전회(轉回)linguistic turn가 이뤄진 시기라 일컬어지는 20세기 초엽 일부 철학자들은 언어철학 자체가 곧 철학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하였다. 왜 이러한 생각이 대두되었는가? 무엇이 언어와 철학을, 혹은 철학과 언어를 그렇게도 밀접하게 연관시키게 하였는가?

 

언어철학을 추동시킨 몇 가지 예비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종종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정의의 본질(本質)nature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의라는 단어word의 의미meaning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사물 내지 실재(實在)reality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의미론semantics 내지 단어의 의미에 관한 물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러한 전환이 철학적 진보라고 생각한다(이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은 이것이 철학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린다trivialise고 생각한다).

언어는 사고(思考)를 표현한다express thought, 혹은 사고를 반영한다mirror. 언어에 관한 탐구는 사고에 관한 탐구, 즉 사고의 특성, 구조, 사고와 세계 간의 관계 등에 관한 탐구로 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Descartes가 생각했듯이, 언어능력을 결여한 존재는 사고의 능력 역시 결여한 존재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와는 다르게 언어는 [우리의 감관에]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으로서, 사고와는 다른 방식으로 객관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세계를 표상(表象)한다represent world.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 언어의 일반적추상적 특징에 관한 연구는 세계의 일반적추상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언어에 대한 탐구 자체가 철학적 기획의 일부이다. 물론 언어는 세계에 실재하는 것으로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적인 언어연구란 어떠해야 하는지, 혹은 그러한 연구를 위한 적절한 자료가 무엇인지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언어를 과학적이고 경험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제기되어야 할 물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일지를 우리는 선험적(先驗的)으로a priori 반성해보아야 한다.

언어에 대한 분석analysis, 특히 논리학의 영향을 받은 의미이론theory of meaning명료성clarity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철학을 정의하는 특성defining feature 중 하나가 바로 어렵고 복잡한 생각을 명료화한다는 점인 까닭에, 언어를 분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부정되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생각들은 전체로든 개별적으로든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추동하기에 충분하다.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언어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뉘었다: 구문론(構文論)syntax, 의미론(意味論)semantics, 화용론(話用論)pragmatics.

 

구문론(또는 통사론(統辭論))은 상징symbol과 상징 간의 관계 혹은 기호sign와 기호 간의 관계를 다룬다. 기본적으로 문법grammar 내지 문법성grammarity과 연관되는바, 구문론의 목적은 주어진 일련의 기호열()이 올바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be well formed 여부를 결정해주는 기초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의미론은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mean , 표현하는express , 관계하는 것be about to 등을 다룬다. 의미론을 정의하는 더욱 근본적인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통적으로 가장 우세한 관점에 따르자면, 의미론이란 임의의 서술문(敍述文)decalarative sentence진리-조건truth-condition을 결정하는 규칙의 체계를 정식화하는formulate 것이다.

화용론은 아직 그 목적이 다양하다고 여겨지지만, 넓게 말하자면 문장의 사용use과 주로 연관된다. 즉 특정 문장에 대해 특정한 의미론적 속성이 주어질 경우, 실제 의사소통 상황에서 그 문장이 발화utter됨으로써 어떠한 행위가 수행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셋 중 하나의 하위분야에 대한 고려가 여타의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어떤 분야가 나머지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인지, 그 경우 근본적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기도 하였다. 때로는 이러한 3분법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에 부쳐지기도 하였다.


위의 점 항목들 중 네번째에서 암시되었듯이 언어학linguistics이라 불리는 과학적 분과가 존재한다. 언어철학과 언어에 대학 과학으로서의 언어학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우선 말해둘 것은 양 분야를 깔끔하고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단일한 방식은 없다는 점이다. 이 구분법은 부분적으로는 종류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이며, 부분적으로는 제도적인 학문분류를 위한 역사적인 문제이다. 일테면 형식논리학이 컴퓨터과학이나 수학이나 철학 모두에서 다뤄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언어철학의 학문적 성격에 관해 몇 가지 사항을 덧붙일 수 있겠다.

첫째로, 언어학에서 그러한 것보다 더한 정도로 철학은 지식,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 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둘째로, 언어학은 철학에 비해 언어의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 더욱 관심하는바, 현실에 우연히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들을 그것이 지닌 복잡한 모습 그대로 탐구한다. 반면 안락의자 학문이라는 다소 조롱조의 말에서 시사되듯이, 철학은 언어의 선험적인 측면에 더욱 관심하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학은 이론적 측면과 응용적 측면으로 나뉠 수 있다. 반면 언어철학은 주로 이론적인 측면과 연관되며 특히 의미이론theory of meaning에 관심을 기울인다. 의미이론이란 거칠게 말해 의미론과 동등한 것으로서 언어학과 언어철학 양자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의미이론이 점하는 범위는 이론적 언어학에서보다 한편으로 더욱 좁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깊다. 일테면 지시(指示)reference(언어표현이 지닌바 에 관함aboutness, of-ness이라는 속성), 진리()truth, 인지적 내용cognitive content 등은 표준적인 철학적 이론 및 언어학적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개념들이지만, 그 개념들의 지위, 정당성, 본성 등에 관한 탐구는 철학 고유의 영역이다.

언어학과 언어철학 간의 관계에 대해 다소 불분명하지만 유용한 비유를 들어보자면, 수학과 수학철학philosophy of mathmatics 간의 관계를 들 수 있겠다. 우리는 수학에서 수, 분수, 함수 등의 개념이라든가, 대수학, 삼각법, 미적분학 등과 같은 수학적 방법을 배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대수학의 궁극적인 기초는 무엇일까? , 분수, 함수란 무엇일까? 그것들은 돌멩이나 고양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의문을 갖는다면, 당신은 더이상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철학의 영역에 발을 내디딘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철학은 언어학에 비해 더욱 반성적인reflexive 학문이며, 의미이론에 관해 더욱 메타적인 관점meta-perspective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이런 연유로 언어철학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작업을 메타-의미론meta-semantics이라 칭하기도 한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언어학자들이 이해하는 바대로의 순수 구문론은 비교적 덜 다뤄질 것이며, 다만 의미이론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사항만을 살펴볼 것이다. 반면 화용론에 대해서는 더욱 많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화용론 자체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특성과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론 내지 의미이론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화용론적 접근에 의해 일정 부분 해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논의의 개요

 

우리의 논의는 의미에 관한 고전적인 이론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좀 더 최근에 제기된 의미이론을 살펴보는 데에 참고할 만한 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타 분야의 철학자들이 친숙하게 여길 법한 언어철학의 핵심 사항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의미이론이다. 언어철학 분야의 선구자격 인물로서 Platon이나 J. Locke 등을 들 수도 있겠으나, 언어철학이 비교적 최근에서야 그 원숙기에 도달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진정한 선구자격 인물은 Gottlob Frege(1848-1924)Bertrand Russell(1872-1970)이라 할 수 있다. 두 인물의 이론은 각각 2장과 3장에서 다뤄질 것이다.

1장은 상식에 호소하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이론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 이론을 소박한 의미론naive semantics이라 칭할 것이다. 소박한 의미론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단칭용어, 술어, 진리-함수적 연결사 등과 같은 기초적인 논리학적 개념들이 도입될 것이다(논리학에 이미 숙달한 독자라면 이 부분을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4장에서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 Ludwig Wittgenstein(1889-1951)前期철학의 대표 저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에 개진된 이론을 먼저 살펴본다. 연후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1920년대와 30년대에 뚜렷한 철학적 운동으로 발흥하여 1950년대까지 언어철학에서 주도적인 흐름이었던 소위 논리실증주의혹은 논리경험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그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Rudolf Carnap (1891-1970)Alfred Jules Ayer(1910-80)가 논의될 것이다.

5장에서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좀 더 최근의 시기에, FregeRussell의 의미이론뿐만 아니라 논리실증주의에도 반발하여 대두된 대안적인 이론을 살펴본다. 이는 직접지시론dirct reference theory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대체로 Saul Kripke가 처음 제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직접지시론은 철학의 여타 분야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특히 형이상학과 인식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6장에서는 1960년대 말경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주제로서, ‘, 여기, 지금등과 같은 지표사indexical의 맥락-가변성context-variability에 대해 살펴본다. David Kaplan이 제시한 이론을 활용하여 그 주제에 접근할 것이다.

7장의 주제는 언어의 사용에 관한 이론인 화용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화용론을 의미론에 부차적인 것 내지는 의미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언어표현에 특정한 의미론적 속성이 결정되어있다는 가정하에 그 표현이 사용될 때의 화용론적인 작동방식을 탐구한다.] 8장에서는 주로 FregeRussell의 언어철학에 의해 촉발된 아주 어려운 철학적 퍼즐인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에 관한 의미론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명제적 태도 문장이란 특정 믿음을 누군가에게 귀속시키는 언어표현으로서, ‘Darwin은 인류와 고릴라가 공통된 조상을 지닌다고 믿었다와 같은 문장이다. 여기서 살펴볼 문제영역은 매우 난해하지만, 그런 만큼 학습자의 흥미를 고취시킬 것이다.

9장에서는 Donald Davidson(1917-2003)에 의해 제시된 유명한 이론을 살펴본다, 이 이론은 의미와 지시 개념의 기저에 있는 특성을 기술하고자 하되, 그 개념들에 의존함이 없이 그 과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Davidson의 의미이론은 의미와 지시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가정이 없이도 임의의 언어-사용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명시적인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즉 의미라는 개념의 도움 없이도, 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낼 수 있는 그러한 의미이론을 고안해내는 방법 일반에 관한 논의가 Davidson의 핵심적인 구상이다.] 이러한 설명을 고안해내는 절차를 Davidson원초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이라 칭하였다.

반면 어떤 이론가들은 의미이론을 정식화한다는 생각 자체에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10장의 주제인 Willard Van Orman Quine(1908-2000)은 단어들 및 문장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11장의 주제인 後期 Wittgenstein의 대표작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에 개진된 관점 역시 어느 정도는 Quine의 생각과 합치한다. 그에 따르면 의미에 관한 엄밀한 이론을 고안하고자 하는 모든 기도는 근본적으로 오도적인바, 그 대신 우리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언어현상에 접근해야 하며 그에 따라 의미에 얽힌 철학적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 12장은 최근에 주목받는 다음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룬다: 주장assertion, 허구적 대상fictional object, 맥락-상대성context-relativity, 추론주의inferentialism, 슬러slur.

 

각 장에는 장별 요약, 역사적 사항(12장 제외), 더 읽을거리 목록(주요 읽을거리 및 추가적인 읽을거리), 심화된 탐구를 위한 연습문제 등이 제시되어있으며, 마지막 장 뒤에는 주요용어에 대한 해설목록이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언어철학에서 유명한 이름들과 이론들, 범형이 되는 논증들과 비판들에 다소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은 바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한다면 주요 읽을거리 목록에 제시된 문헌들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이에 더해 역사적인 언급사항들 및 추가적인 읽을거리 목록까지 십분 활용한다면, 언어철학에 대한 다소의 소양을 갖추는 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언어철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에 앞서 갖춰야 할 몇몇 기초적인 사항들을 숙지하고 논의에 사용될 특정 전문용어terminology들을 도입한다. 이번 장에서 이하에 제시될 내용들은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10장까지 논의되는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많게든 적게든 이러한 사항들을 어떤 의미에서건 받아들이기에, 이를 숙지하는 편이 유용할 것이다.

 

 

8개의 예비사항

 

독자들은 주요 기술적이론적 용어들 몇몇이 이미 앞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처음 사용될 경우엔 볼드체로 쓰였으며,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은 책 말미의 주요용어해설에 제시되어 있다. 이탤릭체로 쓰인 단어나 문장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몇몇 장에는 추가적인 논의라는 절이 포함되어 있다. 철학적으로 흥미롭긴 하지만, 본문의 주된 논의보다 더 어렵거나 혹은 덜 중요한 사항들이 다뤄진다.

유형-개항 구분: 다음 문장은 몇 개의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네 개가 내 개를 물었다.

일견 5개라고 답하고 싶겠지만 속임수에 주의해야 한다. 답은 문제에서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달라진다. 정확히 말해 이 문장은 라는 단어의 한 유형(類型)type에 속하는 두 개의 개항(個項)token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단어-유형 가 두 번 나타난다occur.

동일성과 술어화로서의 이다is구분: 유명 블루스 음악가 Ray Charles에 관한 다음 농담을 보자: ‘God is love. Love is blind. Ray Charles is Blind. Therefore Ray Charles is God.’ 설사 Ray Charles가 정말로 신이라 할지라도, 이 추론은 결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오류는 [논증의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어 이다에 대한 해석에 있다. 이 논증에서 나타나는 단어-개항 이다는 전부, 등호 ‘=’와 같다/동일하다와 같은 동일성identity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전제에 나타나는 이다는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The cat is hungry’에서처럼 술어화predicatioln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Ray Charles는 눈이 멀었을blind 뿐 맹목임blindness 자체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러한 분석이 미심쩍어 보인다면, 좀 더 형식적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동일성은 대칭성(對稱性)symmetry과 이행성(移行性)transitivity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일성의 대칭성에 따르면 a=b인 경우 b=a이다. 동일성의 이행성에 따르면 a=b이고 b=c인 경우 a=c이다. 이제 위 논증에서 나타나는 이다를 전부 동일성으로 해석한다면, 세 번째 전제와 ‘Stevie Wonder is blind’로부터 ‘Stevie Wonder is Ray Charles’를 추론할 수 있게 된다. [‘Ray Charles=blind’이므로 동일성의 대칭성에 의해 ‘Blind=Ray Charles’이고, 동일성의 이행성에 의해 ‘Stevie Wonder=Ray Charles’가 도출된다.] 이는 분명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결론이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고자 한다면 동일성으로서의 이다와 술어화로서의 이다를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앞으로의 논의에서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등호 ‘=’만을 사용하고, ‘이다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술어로서만 사용될 것이다.

지시개념: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단어들 중 많은 것들이 언어철학에서도 사용되지만, 철학에서는 그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쓰일 때와 달리 더욱 명료하고 엄밀한 방식으로 쓰여야 한다. 특히 지시(指示)reference라는 용어가 언어철학에 도입되어 사용되는 방식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보스톤과 보스톤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일상언어로 그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단어 보스톤은 실제 도시 보스톤을 지칭(指稱)한다designate, 이름한다label, 의미한다mean, 외연적(外延的)으로 지시한다(외포(外包)한다)denote, 나타낸다indicate /stand for, 짚어낸다pick out, 언급한다mention, 일컫는다name, (전자가 후자의)이름이 된다is the name of, (전자가 후자를)내용으로 갖는다has content of, 뜻한다signify 등등. 이러한 관계 전부를 통칭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우리는 지시를 택하기로 한다. 단어 보스톤은 도시 보스톤을 지시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보스톤은 보스톤지시체referent이다.

사용-언급 구분: 이미 5항에서 시사된 점으로서, [언어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 때 인용부호quotation mark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은 참이다:

(a) 보스톤은 미국 동부 해안가에 있는 도시다.
(b) ’보스톤은 세 글자로 되어있다.

(a)는 실제 도시에 관해 [언어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반면, (b)는 도시의 이름인 단어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a)는 단어 보스톤사용use하고 있고 (b)는 단지 그 단어를 언급mentoion하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b)는 도시 보스톤에 관한 것이 아니며 단지 그 이름에 관한 것이다.
특이한 사례로서, 다음 문장은 단어 보스톤을 언급하는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c) ‘보스톤은 보스톤을 지시한다refer.

다음과 같이 인용부호 내부에서 인용부호가 반복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d) ‘“보스톤”’보스톤을 지시한다.

(c)(d)를 비교하자면, 전자는 보스톤을 지시하는 보스톤의 이름에 관해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보스톤의 이름을 지시하는 보스톤의 이름의 이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사용-언급 구분은 매우 사소해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언어 자체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논의 중인 내용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언어에 관한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세계에 관한 논의를 언어에 관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일견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철학적 문제들은 종종 이러한 구분에 소홀한 탓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탁월한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QuineKurt Gödel은 다름 아닌 Russell이 이 점에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작은 팁을 주자면, 철학적인 글을 작성할 때 인용부호를 여타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자 인용부호를 강조용 따옴표scare quotes로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강조용 따옴표이지 강조용 따옴표라는 언어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용부호를 자꾸 강조의 목적으로 쓰는 것은 최악의 경우 자신의 말을 얼버무리면서 자신은 그로부터 거리를 둔 채, 독자들로 하여금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리-조건과 진리치 개념: 앞으로의 논의에서 문장sentence 내지 진술statement진리-조건truth-condition 및 그 진리치(眞理値)truth value에 대해 논의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진리-조건이라는 용어는 이미 앞서도 사용된 바 있다). 먼저 진술의 진리-조건이란 진술이 참이 되는 환경circumstance/환경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예컨대 ‘Spot은 배고프고 Fido는 젖어 있다의 진리-조건은 ‘Spot은 배고프다의 진리-조건을 포함한다. 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전자는 후자를 논리적으로 함축(含蓄)logically entail/imply하고, 후자는 전자에 의해 논리적으로 함축된다. 다음으로 진술의 진리치란 이름 그대로 진술이 참이 되는 값이 아니다. 단순하게 말해 진술이 참true이면 그 진리치는 참truth이며 진술이 거짓false이면 그 진리치는 거짓falsity이다. 진리-조건 및 진리치 개념은 매우 사소해 보이긴 하지만, 언어철학적 논의를 위한 우리의 언어를 훨씬 정밀하고 안정적이게 만들어 주며, 서로의 말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분석-종합 구분: 분석적(分析的) 문장analytic sentence이라는 개념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자주 사용되었다. 분석성analyticity 개념의 기본 착상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한 문장이 참임이 그 문장에 나타나는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면, 그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다analytic truth. 마찬가지로 한 문장이 거짓임이 그러한 방식으로 알려질 수 있다면, 그 문장은 분석적으로 거짓이다analytic falsehood.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분석성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아주 진부한 예시를 들어보자:

(1)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1)을 구성하는 단어들에 익숙하여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그 누구든, 오로지 단어들 및 문장의 의미에 의해서만 그것이 참임을 이해할 것이다. (1)을 부정하면 자연히 모순contradictory에 빠진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결혼한 총각이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결혼한 총각은 그 용어의 의미에 따라서 모순된다. (1)이 참인지 가려내기 위해 세상의 모든 총각들을 데려다가 미혼인지 여부를 조사할 필요도 없다.
반면 다음은 -분석적인non-analytic , 종합적(綜合的) synthetic truth의 사례들이다:

(2) Charles 왕자는 총각이 아니다.
(3) 모든 총각은 지저분하다.

두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거기 포함된 단어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Charles 왕자와 모든 총각들에 대한 경험적인 정보나 자료가 필요하다.
동의성(同意性)synonymy 개념과 논리적 참의 개념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총각미혼 남성은 동의어synonym로서 같은 것을 의미한다. 둘 중 하나가 나타나는 곳 어디에서든(,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급되는 곳은 제외하고) 그것을 다른 하나로 대체하여도 문장 전체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1)총각미혼 남성으로 대체하면 다음 문장이 얻어진다:

(1) 모든 미혼 남성은 미혼이다.

이 문장 역시 분석적으로 참이다. 또한 명백히 논리적으로 참이다. 이러한 동의성-논리적 진리-분석성 간의 관계를 일반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문장이 동의어를 대체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으로 변환될 수 있다면, 그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다.

 

 

인지적 의미와 표현적 의미

 

다음 두 문장을 보자:

 

Karen의 고양이가 죽었다.

Karen의 야옹이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두 문장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가? 어떤 점에서는 그렇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두 문장이 공통으로 지닌 것은 인지적(認知的) 의미cognitive meaning라 칭해진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두 문장은 고양잇과에 속하는 특정 동물 개체가 죽었다는 동일한 객관적인 사실fact 내지는 동일한 정보information를 전달한다. 두 문장은 동일한 진리-조건을 갖는다: 즉 상상 가능한conceivable 그 어떤 환경에서든 (‘Karen’이 동일인을 지시한다면)두 문장은 동시에 참이거나 동시에 거짓이다. 문장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참/거짓의 차이는 인지적 의미의 차이이다. [어떤 두 문장에 대해 각각의 진리치가 서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면 두 문장의 인지적 의미는 다른 셈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인지적 의미와 다른 의미의 또 다른 차원은 미사여구와 수사학(修辭學)의 영역이다. 문장이 전달하는 하나의 동일한 정보는, 그 정보를 대하는 주관적인 태도나 감정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이는 표현적(表現的) 의미expressive meaning라 칭해진다. 언어의 모든 부분이 동등한 정도로 표현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위 사례에서 전자는 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기 없고 무미건조하다. 학문적인 언어, 특히 수학적인 언어에는 표현적 의미가 최소한이거나 아예 없다.

이후의 논의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인지적 의미이다.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에서 제기되는 철학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바로 인지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혼동의 여지가 없는 한 우리는 의미인지적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의미와 힘

 

전부는 아니더라도, 언어가 갖는 분명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의사소통communication이다.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은 언어적 행위ingustic act 내지는 발화행위speech-act에 의해 달성된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보통 온전한 문장complete sentence 내지는 당면 목적상 온전한 문장에 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표현을 발화utter함으로써 발화행위를 수행한다perform. 즉 무언가를 말한다. ‘당신은 학생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라고 답한다면, 이는 온전한 문장은 아니지만 나는 학생입니다와 동등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명백히 예외적인 경우를 들자면 안녕?’과 같은 인사말이라든가 에구구!’와 같은 감탄사일 것이다. [이 말들은 그 어떤 온전한 문장과도 동등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제 다음 문장들을 생각해보자(이 문장들이 당신에게 말해진 것이라 가정해보라):

 

(5) 너는 회를 먹는다.

(6) 너 회 먹어?

(7) 회 먹어라.

 

(5)서술법declarative mood(직설법indicative mood) 문장, (6)의문법interrogative mood 문장, (7)명령법imperative mood 문장이다. 세 문장 모두 공통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바 그것은 너는 회를 먹는다는 것that you eat raw fish이다. (5)는 당신이 회를 먹는다는 것을 주장assert하거나 말하기 위해 사용된다. (6)은 당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묻기 위해 사용된다. (7)은 당신이 회를 먹도록 권유하거나 명령하거나 행위를 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세 문장이 공통으로 가진 것, 너는 회를 먹는다는 것 이라는 절clause을 통해 표현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공통 요소는 명제(命題)proposition라고 칭해진다. 위의 세 문장이 공통으로 지닌 것은 네가 회를 먹는다는 명제이다. 세 문장 모두 이 명제를 표현하되, (5)는 이 명제가 참이라 주장하고 (6)은 이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묻고, (7)은 이 명제가 참이 되도록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세 문장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지만, 각각은 그 동일한 명제에 각기 다른 (효력)force을 부여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사용된다. (5)주장적 assertoric force, (6)의문적interrogative 힘을, (7)명령적imperative 힘을 그 명제에 부여한다. [다만 이는 통상적인 것일 뿐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무대 위의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경우처럼,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너는 회를 먹는다라고 발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장의 법식은 힘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너 회 먹지라는 평서문을 억양을 조금 다르게 하여 발화함으로써 청자가 회를 먹는지 여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장의 법식은 힘의 필요조건도 아니다.] 요컨대 한 명제에 어떤 유형의 힘이 부여되는지 여부는, 발화된 문장의 문법적 형식에만 순전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나마 화자의 의도라든가 발화가 이뤄지는 주변 맥락context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5)-(7)에서 예시된 문법적인 법식(法式)grammatical mood들은 대체로 각각에 특유한characteristic 힘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다. 표현된 한 명제에 어떤 힘이 부여되는지는 전형적으로 각 힘에 상응하는 적절한 법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파악될 수 있다. 법식은 문법적인 특성, 좀 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구문론적인 특성이고, 힘은 화용론적인 특성이다. [(그리고 법식에 의해 힘이 부여되는 명제는 의미론적인 특성이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서술적 문장은 대체로 차치할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보통 서술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절에서 도입된 명제라는 것의 본성 및 그것이 문장에 대해 갖는 관계 역시 살펴볼 필요가 다. 다음 세 문장을 보자:

 

눈은 하얗다.

Schnee ist weiss.

La neige est blanche.

 

세 서술문은 서로에 대한 올바른 번역translation이라는 점에서 동의적synonymous이다. 세 문장 모두 눈이 하얗다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 문장이 공통으로 지닌 요소는, 한국어의 눈이 하얗다는 것이라는 절과 같은 그 어떤 특정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명제이다. 세 문장 모두 눈이 하얗다는 명제를 표현한다express. 한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표현하는 명제이다. [세 문장 모두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므로 세 문장은 동의적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세 문장은 동일한 내용content을 갖는다.

우리는 의미를 특별한 종류의 실체(實體)entity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명제는 문장-의미로서, 문장 자체 내지 어절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한 명제는 동의적인 여러 문장들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다. 이는 마치 수 4가 비틀즈나 클래식 4중주단과 같이 네 개의 원소를 갖는 모든 집합set 내지 모임collection에 공통적인 것과 같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수나 명제와 같은 추상적 실체abstract entity들이 실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논의에 유익하기도 하다. 10장과 11장에서는 이러한 생각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맥락-의존성

 

명제가 문장의 의미라는 점을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이에 대해 재고할 사항이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나는 Julius Caesar의 아버지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정한 바에 따라 명제가 문장의 의미라면, 위 문장은 온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셈이다. 위 문장의 경우, 동일한 그 문장을 누가(언제) 발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명제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위 문장에 나타나는 라는 단어가 누구에 의해 발화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을 짚어내거나 지시하기 때문이다. 일반화하자면 는 발화될 때마다 그 화자를 지시한다. 위 문장이 Julius Caesar의 아버지와 Groucho Marx에 의해 발화된다면 각기 다른 명제들이 표현된다. ‘와 같이 이런 특성을 갖는 단어들, 즉 발화가 이뤄지는 시간, 장소, 화자 및 청자의 정체성 등등 발화의 맥락(脈絡)context of utterance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지시하는 단어들은 매우 많다:

 

여기

발화가 이뤄진 장소를 지시

지금

발화가 이뤄진 시점을 지시

화자에 의해 의도된 청자를 지시

이것, 저것

화자에 의해 가리켜진 대상을 지시

 

이러한 표현들은 지표사(指標詞)indexical(또는 지시적deictic표현)라 칭해진다. 방금 제시된 것들은 다소 단순하고 명백하게 맥락-의존적context-dependent인 지표사들이다. 보다 덜 명백한 사례로는 동사의 시제(時制)를 들 수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Octavianus는 로마제국의 황제이다.

 

여기서 지표성indexicality은 현재시제로 쓰인 동사 이다에서 드러난다. Octavianus(Augustus Caesar)가 황제가 된 시점인 기원전 27년 이전이라면 이 문장은 거짓 명제를 표현하며, 그 이후 Octavianus가 황제로 재위한 기간 동안은 참인 명제를 표현한다(그리고 그가 죽은 시점인 기원전 14년 이후부터는 다시 거짓 명제를 표현할 것이다). 현재시제 이다뿐만 아니라 미래시제 일 것이다와 과거시제 였다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문장은 시제동사를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적어도 발화의 시점이라는 측면에서는 맥락-의존적인 셈이다.

이것이나 저것등의 용어는 다소 특이한 지표사로서 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라 칭해진다. 지시사가 사용될 때에는 그 지시체를 확정하기 위해 발화의 맥락뿐만 아니라 손가락질과 같은 몸짓gesture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한 몸짓 내지 그에 준하는 것을 보통 -지시화demonstration라 한다.

맥락-의존성을 띠는 표현들을 감안하였을 때, 명제를 문장 자체의 특성이라 하기 보다는 문장에 대한 (실제적이거나 가능적인)발화의 특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하다. 명제는 문장이 맥락에 대해 맺는 관계에 따라서, 혹은 맥락 내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맥락이란 발화가 이뤄지는 장소와 시점, 화자 및 청자의 정체성, -지시화에 의해 가리켜진 대상 등으로 구성된 집합이다. 따라서 문장이란 주어진 맥락에서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결정하는 하나의 규칙 내지는 함수(函數)function와 같다(이와 연관된 개념으로서 진술(陳述)statement이란 주어진 맥락에서 내가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즉 특정 맥락에서 발화된 문장이 진술이다]). 따라서 문장이 명제를 표현하는 전체적인 그림은 다음과 같다:

 

문장 + 맥락 명제

 

당분간은 모든 형태의 맥락-의존성을 대체로 도외시할 것이다. 임의의 한 서술문은 맥락에 상관없이 동일한 하나의 명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맥락-의존성과 지표사에 관해서는 6, 7, 12장에서 다시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명제의 역할

 

(A) 문장의 의미.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명제는 동물도 광물도 채소도 아니다. 명제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처럼 명제는 물질적인 대상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抽象的)인 실체abstract entity이다(곧 살펴보겠지만 명제는 정신적인 실체mental entity도 아니다). 이렇듯 명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그것이 하는 역할의 측면 및 명제가 여타의 것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특징지어볼 수 있다(이는 마치 수 2를 그 자체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1 뒤에 오고 3에 앞서는 것이라든가, Charles 왕자의 귀의 개수 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규정해보는 것과 비슷하다). 앞서 우리는 눈이 하얗다는 명제가 위의 세 문장의 의미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렇듯 명제의 첫 번째 역할은 (특정 발화의 맥락에 따라)문장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B) 명제적 태도의 대상. 명제의 두 번째 역할은 Russell이 칭한바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는 것과 연관된다. John, Pierre, Hans 세 사람이 있다. 그들은 각각 영어 불어, 독일어만을 할 줄 안다. 세 사람 모두 눈이 하얗다고 믿는다. 즉 다음과 같은 라는 것-that-clause에 대해:

 

눈이 하얗다는 것

 

다음 세 문장은 참이다:

 

(8) John은 눈이 하얗다고 믿는다believes that.

(9) Pierre는 눈이 하얗다고 믿는다.

(10) Hans는 눈이 하얗다고 믿는다.

 

분명 세 사람 모두 동일한 것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해 JohnPierreHans 모두에 의해 믿어지는 적어도 하나의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명제, 눈이 하얗다는 명제이다.

이제 (8)-(10)으로부터 다음을 추론했다고 해보자:

 

(11) John, Pierre, Hans에 의해 믿어지는 무언가가 있다.

 

이 추론은 타당한 듯하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일상적으로 믿음belief에 관해 추론을 할 때 우리는 명제의 존재에 개입하고commit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명제가 정신적인 실체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명제는 세 사람 모두에 의해 공통적으로 믿어질 수 있는 것인 반면, 감정, , 고통 등의 정신적인 실체들[(엄밀히 말하면 정신적인 실체-개항)]이 복수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정신적 실체는 오로지 하나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렇듯 명제란 믿음의 대상이다. 명제를 믿는다는 것은 그 명제에 대해 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명제적 태도 즉 명제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다. 믿음 외에도 수많은 명제적 태도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저녁 식사로 나온 생선요리가 신선하다고 믿을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그것을 의심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것이 사실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러기를 희망할 수도 있다.

(C) 진리-담지체. 명제의 세 번째 역할은 진리-담지체truth-vehicle로서의 역할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잠시 맥락-상대성 개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단. 다음 대화를 보자:

 

Phocas: 가 로마제국의 적법한 황제이다.

Maurius: 가 로마제국의 적법한 황제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로마제국의 적법한 황제는 오직 한 사람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확히 동일한 문장(동일한 문장-유형의 두 개의 문장-개항)을 말했다. 여기서 의미론적인 차이는, PhocasPhocas가 황제라고 말했다는 점과 MariusMarius가 황제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말한 것은 암묵적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Marius의 말이 참이다(Phocas는 부적절한 왕위 찬탈자였다). 둘은 동일한 문장을 말했으나 각기 다른 명제를 표현했다. 동일한 하나의 것이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참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문장 자체가 아니라 명제이다. 이 사례에서는 Marius가 로마의 적법한 황제라는 명제만이 참이다. 이는 Marius에 의해 주장된 내용이고 Phocas에 의해서는 부정된 내용이다.

정리하자면 명제란:

(발화의 맥락에 따른) 문장의 의미 내지 내용이다.

명제적 태도의 대상이다.

참과 거짓의 담지체(직접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것)이다.

 

 

구성성, 구조, 이해

 

이제 다시 맥락-의존성으로 되돌아가자. 문장을 이해한다understand는 것은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는 것이다. 일단 앞선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규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문장이 의미하는 바란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이기 때문에,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자.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문장을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우르두Urdu를 전공한 사람이 우르두어의 특정 문장을 보여주며 그것이 눈이 하얗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자. 이제 나는 그 문장이 눈이 하얗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우르두어 문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언어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단어들의 의미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이 결합됨으로써 유의미해지는 방식 역시 파악해야 한다. 우르두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우리말 눈은 하얗다를 생각해보자.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이다’, ‘하얗다의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이 그런 식으로 결합되는 방식의 유의미성significance 역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절의 초입에 말했듯이 발화의 맥락을 차치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정식화할 수 있겠다:

구성성(構成性)(조합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compositionality:

문장의 의미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 및 문장이 구성된 문법적 구조의 의미론적인 유의미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정식화에서 첫 번째 조건은 상대적으로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버마Burmese만을 할 줄 하는 언어 사용자는 모든 단어들이 속속들이 번역된 버마어-한국어 사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한국어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 ‘개가 아기를 물었다아기가 개를 물었다는 분명 동일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어들이 배열된 순서의 차이가 두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버마어 사용자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철저하고 상세한 사전을 참조한다 한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 언어 내에서의 사례를 통해서도 두 번째 조건의 중요성을 고찰해볼 수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당신이 듣도 보도 못했을 문장들이 무한히 많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언어에 충분히 숙달해 있는 능숙한 언어 사용자라면, 아무리 새로운 문장을 듣거나 보더라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신이 구성성 원리의 두 번째 요건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예시로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의 능력은 무한하게 창조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너무나 비근하고 진부해서 좀처럼 주목되지 않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능력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우리가 구성성의 원리에 따라 언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와 그 문장의 구문론적인 구조가 지닌 의미론적 유의미성을 파악한다면, 아무리 새로운 문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 두뇌가 유한하기에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단어들과 문법적 원리 역시 유한하지만, 우리는 유한한 지식만으로도 있을 수 있는 매우 많은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예시를 들어보자: 능숙한 한국어 화자는 그는 그녀의 아버지이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이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이다등등의 문장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문장이 이런 식으로 엄청나게 길어진다면 문장 전체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집중력을 잃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제한사항일 뿐이다. 요점은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 아버지이다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원리적으로in principle 충분하다는 것이다. 언어표현의 이런 작동방식은 회귀적(回歸的)recursive(또는 반복적iterative’)이라고 칭해진다. 새로운 문장을 이해하는 무한하고 창조적인 인간 언어능력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언어의 회귀적 성격이다. 컴퓨터에 비유해보자면, 인간이 지닌 언어능력의 유한성은 단지 하드웨어에 기인하는 것일 뿐, 우리에게 내장된 프로그램 내지 소프트웨어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회귀성에 토대를 둔바 인간 언어능력의 이러한 창조성은 인간의 참된 언어능력과 앵무새, 영장류, 돌고래 등이 지닌 유사-언어적 행동language-like behaviour 간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유사-언어적 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은 개별적인 단어 내지 기호들을 배열하여 사용하거나 그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듯하며, 초보적인 문장에 근사한 형태로 그것들을 조합할 줄 아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동물들이 참된 회귀적 성격에 따라 언어를 사용 및 이해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와 반대로, 구성성compositionality이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고유한 특성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경향 역시 존재한다. Daniel Everett(2008)에 따르면 아마존 강 유역에 거주하는 Pirahã 부족의 언어는 구성적이지 않다. 몇몇 학자들은 이 사실을 구성적 구조가 인간의 유전형질에 본래적인 부분은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하며, 인간 언어능력이 Noam Chomsky가 주장한 방식대로 보편적생득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기호 사용의 회귀성구성성이 참된 언어의 필요조건인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논쟁들에까지 휘말려들 필요는 없다. 회귀성 및 구성성은 적어도 우리가 언어철학적으로 관심하는 부류의 언어에 대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며, 인간 이외의 동물들의 언어적 능력이라든가 구성적이지 않은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실제 연구결과나 잠재적인 연구 가능성은 이 책에서 관심할 사항이 아니다.

구성성의 원리는 가장 중요한 의미론적 원리라 할 수 있다. 유비컨대 생물학에서 자연선택의 원리가 매우 중요한 원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둘 다 반례를 허용한다는 점 역시 공통적이다). 모든 언어는 이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한한 수의 새로운 문장을 우리가 어떻게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는 전연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남을 것이다.

구성성 원리를 처음으로 천명했다고 간주되는 인물은 Gottlob Frege이다. 이런 점으로 인해 그 원리는 종종 Frege의 원리Frege’s principle이라 불리기도 한다. 다소 몰역사적인 사항들이 다뤄진 이번 장을, 그의 소론 복합적 사고Compound Thought(1923, 이는 보다 확장된 글인 논리적 탐구Logical Investigations의 일부이다)로부터의 인용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언어가 할 수 있는 바는 가히 놀랍다. 적은 수의 음절들만으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생각(사고)thoughts이 표현됨으로써, 인간이 아무리 처음 떠올린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일절 접해본 바 없는 사람 역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문장의 부분들이 사유의 부분들에 대응한다는 것, 그래서 문장의 구조가 사유의 구조를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일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Frege, 1984, 3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