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 그의 철학적 주제들 헤겔총서 1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예전부터 헤겔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나름 이해하고 느끼는 바가 있어 더 상세히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 싶은 지적 욕구에서 자극된 관심이었다 헤겔도 분명 사람이었으니, 초등학교 교장도 지내보고 말은 좀 툭툭 끊겨도 강의가 인기 있는 대학 교수였던 지식인이었으니, 그의 철학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세계는 절대정신의 자기인식이다' 하는 따위의 말들을 하였는지 이해해보고 싶었다 카르납은 헤겔의 책을 읽고 낙담한 학생들은 자신의 무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헤겔의 헛소리를 탓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를 탓하더라도 그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이해해본 뒤 탓하고 싶었다

그런 관심에서 헤겔을 읽어보아도,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이전에 읽은 헤겔 관련 책은 그의 "역사철학강의"와 "정신현상학",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독일 관념론 철학", 프레드릭 코플스톤의 "18, 19세기 독일철학" 등 네 권과, 각종 철학사 윤리학사 종교철학 예술철학 관련 책들에서 헤겔에 관해 서술된 단편적인 내용들이었다 거짓말 안 하고, 그것들을 통해 내가 헤겔에 대해 이해하게 된 바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읽고 나서 뭘 읽었는지 기억 나질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리뷰가 호평인 것을 보고 구입한 이 책은 달랐다 난해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명료한 문체로 쓰여서 일단 읽기가 수월하였고, 헤겔 고유의 전문용어들을 간략하게 해설한 뒤 그 용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을 염두에 둔 채 그와 관련되어 진행되는 논의가 헤겔 철학을 대강이나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헤겔 철학에 쏟아지는 교조적인 동의와 비판 사이에서 균형잡힌 해석을 제공하려는 저자의 노력도 특기할 만한 장점이다 헤겔이 무엇을 문제삼아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는지, 나름대로 조금은 이해하게 해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서 언급한 네 권 책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니 외려 과제가 생겼다 뭔갈 배운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다만 "헤겔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저술되었다"는 저자의 말에는 감히 동의하지 못하겠다 여느 학문 분야의 여느 학자 혹은 학파든, 그 개별 이론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학문적 흐름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진부한 말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헤겔에 입문하는 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근대 계몽주의, 칸트, 독일 낭만주의, 피히테와 셸링의 관념론 등에 대한 일차적인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헤겔의 1차서적을 읽는 것 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질 것 같다 요컨대 철학에 교양 수준의 관심은 있지만 헤겔 철학 자체와 그 전후 맥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저자가 말하는 '헤겔을 처음 접하는 독자'층이 문자 그대로 이런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각 장마다 헤겔의 문제의식이 싹튼 철학사적 맥락이 간략하고 평이하게 설명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 관념이 무엇인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칸트가 구분한바 자연과 자유에 대응하는 현상계와 예지계가 무엇인지, 독일 낭만주의자들과 관념론자들이 칸트철학에서 발견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저자의 간략한 맥락 설명마저도 읽기 싫어지는 부담스런 내용으로밖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철학사 한 권 및 칸트 철학 전반에 대한 평이한 해설서 한 권, 이렇게 두 권 정도는 읽어놔야, 이 책을 읽는 재미와 소득이 더 커질 듯하다 '탈레스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는 지식을 안다고 해서 고대 자연철학을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듯이, '헤겔은 칸트가 이성의 인식론적 권리와 형이상학적 권리에 대해 규정한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였다' 하는 등의 지식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헤겔의 철학을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소박한 의미에서라도 나는 '모든 앎 즉 학문은 체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앎 즉 학문이 된다'는 헤겔의 말에 동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