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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거지빌라
나주희 지음 / 북시그니처 / 2024년 10월
평점 :
창과 방패 같은 느낌의 모순적인 제목 '리치거지' 빌라!
'아름다운 난초' 라는 멋진 뜻을 지닌 가난산이 있는 가난동에 엄지 손가락을 의미하는 거지(巨指) 빌라가 있다. 거지는 빌라 주인의 아호라고 하는 데, 발음과 의미가 심하게 상충하는 이곳에는 1.2.3층과 옥탑방까지 10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극단적인 이름의 동네와 빌라지만 사람들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서민들이다.
가난한 가수, 화가, 요리사, 감독지망생의 31살 동갑내기 남자 4명은 3층의 주민들이다.
2층에는 6살, 9살 남매를 둔 부부가 사는 데 안타깝게도 아빠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중이다.
어느 날, 옥탑방에 들어와 살게 된 51세 마리아는 좀 색다른 사람이다. 이름도 예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같더니, 그녀는 '서로 사랑하라' 는 아버지의 명령을 삶에 실천하려 한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위치, 건물, 사람에게 까지 이름을 지어주며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물론, 독자마다 해석의 여지는 다를 수 있다.
또한, 독특하게도 작가 스스로 이미 이 소설의 소재를 사랑, 로맨스, 판타지, 액션, 코미디, 범죄, 스포츠, 사투리 임을 밝힌다. 심지어, 많은 대화문과 기독교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리 주의도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위트넘치는 설정이 한 가득이지만, 각종 에피소드들은 주변에서 흔히 보고, 주워 듣고, 뉴스에서도 종종 보는 소시민들의 일상이다.
2층 남매의 엄마 시하는 남편의 사고 이후, 교회에 다니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왜 자신들의 가족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하루하루 삶에 지친 서민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성함도 사치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살길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삶에 둔감해지고 차가워진다. 아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기에 받아보지 못한 이들은 주는 법도 모른다.
이때 , 마리아가 나타났다.
때로는 사랑과 온정의 작은 행위 하나로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쳐 꽝꽝 얼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녹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너무 리얼한 현실극이면서도 판타지 같다. 모두가 꿈꾸는 따스함이 위대한 신이 아닌, 리치한 부자들의 금전도 아닌 그저 작은 한 사람으로 부터 시작됨을 보여주니 말이다.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와 교훈이 빠르게 읽히고 생동감 넘치는 각 인물들의 매력에 빠져든다. 느껴지는 감동이 잔잔하고 오래가서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