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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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더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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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는 고통만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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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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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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