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집은 삶을 짜는 일이지

인류의 역사에 건축이 먼저 생겼지 예술이나 공학이 먼저 생긴 게 아니다. 예술이나 공학이 없던 시절에도 집은있었음을 상기하시라.
건축설계라는 일이 남의 삶을 조직해 주는 것인 만큼, 건축가가 좋은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한 관심의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바른 건축 공부란 우리 삶의 형식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남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문학과 영화 등을보고 익혀야 하며, 과거에 어떻게 산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들추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를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하므로,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넣으려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어야 한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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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오현으로 숭상받는 김굉필의 단단한 오기를 기린 곳, 도동서원.
죽음이 생애를 규정한다, 연산군의 첫 사림 순교자 김굉필처럼.

#도동서원 #김굉필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죽음을 맞이하느냐로 판단된다. 김굉필은 정적들에겐 지독한 적이었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 후학들에겐 위대한 실천가였다. 도동서원은 서원이란 독특한 건축 장르가 진정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서원을 찾아가는 우리가 서원에서 진정 느껴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서원 건축은 처음부터 화려한 아름다움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평생 모시고 존경할 학자의 뜻을 세우는 것, 이것이 서원의 목표였다. 그래서 소박하면서도 지성적인 건축을 추구했다. 이런 서원 건축의 이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서원이 도동서원이다. 그리고 김굉필을 모신 서원답게 오기와 자존심까지 담아냈다. 이 작은 서원은 그래서 더욱 도드라진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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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고 하면서도 고난에 무기력한 이유

악과 고난에 관해 크리스천들이 가진 첫 번째 자산은, 인격적이고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주관하신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는 변덕‘스러운 운명과 가늠할 수 없는 우연이 삶을 쥐고 흔든다는 악의 문제 앞에서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준다.
두 번째 결정적인 교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셨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신은 세상사에 멀리 떨어져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세계관과 대척점에 서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세 번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를 믿음으로 구원을얻는다는 신념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값을 치르셨으므로 살아가며만나는 힘겨운 일들은 우리가 지난날 저지른 죄의 대가가 아니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게 만든다. 세속주의는 이런 믿음을 줄 수 없다. 덕을 쌓고 선행을 베풀어 구원을 받으라고 주문하는 종교들도 마찬가지다.
네 번째는, 믿는 이들마다 어김없이 죽음을 이기고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교리다. 기쁨과 위안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완결하는 신념이다.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망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이들과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죽으면 무로 돌아가거나 인격이 없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관념보다 훨씬 큰 진정한 위로가 된다. 부활은 육신을 세상에 버려 둔 채 영혼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아름답게 회복한 모습으로 몸을 돌려받게 된다.
...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이런 교리들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세속화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기보다 차라리 그분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편이 비극적인 사태와 마주하는 더 좋은 대비책이라고 본다. 오늘날 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구원을 받고 주님 품에 안겼다는 확신이 있는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돌아가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지, 예수님과 성도들이 육신으로 부
활했고 또 그렇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지 물어보면 고개를 가로젓거나 눈만 껌벅거리는 반응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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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제대로 맞서려면..

루터는 고난에 제대로 맞서려면 ‘거리낌 없는 양심‘을 으뜸이 되는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와 화평하기 위해 인내를 동원하려 해선 안 된다. 시련을 참고 견디려면 이미 그리스도와 화평한 상태여야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차고 넘치도록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깊이신뢰해야 그분처럼 어려움을 견뎌 내는 시늉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다.
흠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고 있다면,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가 혹독한 고통과 괴로움을겪는 시간 동안에도 삶 가운데 동행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 곁을 지키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심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므로 우리의 고난을 그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시는까닭이다(행 9:4; 골 1:24).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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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인간의 힘으로는 자신의 구원에 터럭만큼의 힘도 보탤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설교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거저 주시는 거룩한 은혜로만 온전한 용납을 얻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합법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이해하고 단단히 붙잡는다는 것은 곧 사회나 가족, 남들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까지 자기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숙명에 대한 불안감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을 더없이 자유롭게 하는 사상이다. 십자가 덕분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한편이 되며 부활의 결과로 마침내 모든 문제가 회복될 것을 알기에 고난에 맞설 수 있다.

고난은 ‘내 삶을 다스리고 구원할 힘과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망상을 몰아내 준다. 인간은 ˝역경을 지나면서 텅 빈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은혜로 채울 여지가 생긴다.
루터는 말한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로지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주시고, 병든 이들만 치료하시며, 눈먼 이들만 보게 하시고, 죽은 이들에게만 삶을 되돌려주신다. 죄인들만 거룩하게 하시며, 어리석은 이들만 슬기롭게 하신다. 한마디로, 그분은 가엾은 이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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