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에서 ‘동생‘을 안으셨던 예수님.
그리고 ‘형‘만 만나려고 하는 오늘의 교회.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 끌렸던 부류의 외부인들이 현대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다. 가장 전위적인(avant-garde)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그의미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키너의상자 #우연의일치 #잘못된모멸감

스키너skinner는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스키너 상자"에 비둘기를 한 마리씩 넣었다. 스키너 상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실험 상자로, 안에 갇힌 동물은 실험자가 의도적으로 보낸 메시지만 받을 수 있다. 스키너는 이런 상자 여러 개에 비둘기를 넣고 동일한 시간 간격으로각 상자에 먹이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 비둘기들은 (……) 반응이 자동으로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다. 이들은 먹이를 바라며(……) 계속해서 나름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다. 걸어 다니고 이리저리 돌아보고 몸을 단장한다. 즉, 먹이 제공이라는 사건이 어떤 행동과 우연히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문제는 시간이다. 비둘기는 먹이가 떨어질 때까지 동일한 행동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놀라운 학습 과정이 시작된다. 해당 행동이(왼쪽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행동이라고 하자) 먹이 제공과 연상되면서 이 행동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우연의 일치가 빈번해지는 것이다. 먹이와 이 행동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비둘기의 "기대"가 점점 더강화되면서, 마침내 빈틈없는 확증을 얻게 된다. 계속해서 행한 그 특별한 행동이 먹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며 왼쪽으로 몸을 돌릴 때에만 항상 먹이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미친 비둘기들이 생겨났다. 하나는 왼쪽으로만 반복적으로 돌고,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오른쪽 날개를 펼치며, 또 다른 비둘기는 쉬지 않고 머리를 흔들었다. -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해자가 되려 애쓰는 이유

"가해자-피해자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 인간관계는 비생산적인 관계다. 이런 논쟁은 부부나 연인으로서 함께 건설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길로 이끌 뿐이다.

또한 이 경쟁은 조작된 권력 투쟁이기도 하다. 모욕당한사람은 스스로를 납득시켜 지속적으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아주 인상적으로 전달해 ‘가해자‘로동일시된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고 도덕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면, 가해자에게 지배적 권력을 행사하거나 보복을 행하기도 한다. 혹은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관대하게 면죄를 베풀기 위한 충족 조건으로 억지 사과나 보상 등을 지시하기도한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우세한 위치로 가고, 이전에 능동적이고 권력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모멸감을 준 행위로 인해 열세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가여운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든 아니면 참회자의 삼베옷을 입든 그는 주어진 위치에 전적으로 몰두한다.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다른 적을 만드는 모멸감

모멸감은 극단의 고통이며 모멸의 당사자는 공격(투쟁)과 도피 유형에 번갈아가며 빠진다. 이따금 감정의 폭풍이라는 강렬한 정서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폭풍은 당사자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이리저리 뒤흔든다. 그럼 모멸을 불러일으킨 누군가를 향한 당사자의 감정과 관점은 다른 관찰자의 시선에선완전히 균형을 잃은 극단적인 형태로 보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모욕당한 인물은 고유의 경험을 더 이상 자기 비판적 관찰자 시각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또한 균형을 되찾으라는 관찰자의 지적을, 모멸감을 준 상대의 편을 드는 행위이자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로 여기며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그리고 새로이 모멸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 이 같은원칙이 빠르게 적용된다.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적이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멸감은 ‘피해자‘라는 폭력행위에 대한 자유입장권을 발행한다.

2015년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에서 살인범들은 모하메드Mohammed가 신문 풍자로 모멸당했다 여겼고, 그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테러를 저질렀다 주장했다. 모멸감과 공격의 상관관계에 대해 나는 다른 저서에서 여러 차례 들여다본바가 있다. 공격적이고 잔혹한행위를 범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행위 이전에 자신이피해자였다는 근거를 대며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의 내리면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다른모든 영역에 자유로이 들어가는 입장권이 주어지게 되며공감과 양심은 무효가 된다. "공격을 행하는 이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공격은 선행된 도발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은 공격에 대해 최초의 자극이 아닌 나르시시즘적 모멸 반응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