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독일과 일본의 총칼을 꺾어놓은 일은 당사국을 포함해 주변국을 부흥케 했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지 않게 함으로 해야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다시 정글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세계는 다시 필요 이상의 군비경쟁에 힘을 쏟게 됐다. 자, 그럼 이제 이 필요 이상의 군비경쟁 시대의 열매는 누가 따먹을 것인가?

독일과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경로를 수정하면서, 궁극적으로 두 나라는 소련의 흥망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낳았다. 미국은 일본 헌법 9조 첫 단락에, 일본은 "국가의 주권 행사의 수단인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써의 위협이나 물리력 사용을 포기한다."라고 못 박았다. 독일의 경우 서독은 미국과 연합군의 점령하에서, 그리고 동독은 소련의 점령하에서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주체로 활동할 권리를 포기했다. 이로써 일본과 독일이 과거의 행동 양식으로 돌아갈 선택지가 사실상 배제되었다. 미국이 자국의 힘을 이용해 두 나라에서 "비무장과 민주정체의 채택"을 강제하지 않았어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을지는 의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완전히 철수했다면 두 나라가 어떤 길을 택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두 나라가 부상한 두 지역에서 미국이 야기한 효과는 극적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지정학적 군사적 경로를 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두 나라의 이웃나라들은 수십 년 동안 맛보지 못했던 수준의 안보를 누리게 되었다. 미국이 소련을 억제하는 역할을 대부분 감당하면서, 유럽과 동아시아국가들은 20세기 전반부 내내 전략적 문제에 쏟아부었던 자국의 에너지와 재원을 국내 문제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마음껏 투자할 수 있게되었다.
독일과 일본도 자유로워졌다. 군사력으로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지정학적 야심을 실현할 길이 봉쇄되자, 자국의 에너지와 야심을 경제적 성공과 국내 복지 달성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는 미국이 의도한 바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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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유례없던 세계경찰의 배지를 차게된 미국. 그 무게를 마뜩지 않아하던 미국인들에게 진주만공습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그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윌슨도, 대부분의 다른 국제주의자들도 미국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마뜩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20세기의 새로운 지정학적 구도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을 뿐이다. 영국이 지탱해왔던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는 사라졌다. 따라서 세계는 무질서로 빠져들든가, 미국의 국익과 원칙에 적대적인 나라들의 지배를 받든가 둘 중 하나였다. 유일한 대안은 미국이 직접 새로운 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하고 방어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길뿐이었다. 설사 그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책임을 무기한 짊어지게 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1919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러한 역할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상원은 미국이 국제연맹이나 베르사유 조약에 참여하는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거부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격을 받은 후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물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한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켰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로 하여금 윌슨과 루스벨트 두 대통령들의 주장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미국인과 미국인의 삶의 방식은 적대적인 독재국가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변하고 새로운 전쟁과 통신 기술들, 경제로 인해 미국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딘 애치슨 말마따나 실탄을 장전한 장총을 휴대하고 현관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았다. 미국은 점점 서로 얽히고설키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었고, 좋든 싫든 이러저러한 갈등으로 끌려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익과 삶의 방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미국은 안보의 최전선을 미국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위협이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까지 확장해 야 했다. 미국의 전략은 수동적이기보다는 예방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국제 환경에 단순히 대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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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도 등장할 때부터 악마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을 되돌아볼 때 후대는 우리의 판단에 대해 뭐라고 할까

오늘날 우리는 1930년대에 부상했던 종류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는 게 상식처럼 통용된다. 우리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같은 족속이고 그런 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등장하지 않으며, 설사 등장한다고 해도 우리는 1930년대의 어리석은 고립주의자들과는 달리 적절히 대응을 하게 되리라고 다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미국인들도 그런 판단에 매몰돼 안심했다. 1920년대나 심지어 1930년대에조차 강제수용소의 숙청과 참상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스탈린을 괴물로 여긴 이는 거의 없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유럽의 파시즘을 특히 위험하다거나 사악하다고 여긴 미국인도 거의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필요한 막강한지도자로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오늘날 일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강한 지도자"라는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을 흠모하듯 말이다. 히틀러를 위험한 극단주의자라고 여긴 미국인들도 있고, 미국인들이 보다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한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여기는 미국인들도 있었다.
뒤늦게 가서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히틀러를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렇게 된 후에도 그를 미국과 민주정체를 토대로 한 생활방식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한 이는 거의 없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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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태어났지만 MIT에 진학해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받은 Cody Coleman. 지지와 요구를 같이 하는 현명한 부모뿐 아니라 적절한 순간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일어설 수 있다.

콜먼의 말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운동을 아주 잘하지도, 똑하지 못했어요. 처음에 영어는 특별 보충 수업을 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수학 점수는 잘해야 평균 정도였고요."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루는 저보다 열여덟 살이나 많은 큰형이 집에 왔습니다. 고등학교에 간 뒤 처음 맞는 여름방학 때였죠. 형이 제게 2주 동안 자기 집에서 지내자며 저를 데리러 버지니아에서부터 차를 몰고 온 거였어요. 형은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저를 바라보면서 ‘대학은 어디로 가고 싶니?"라고 물었어요."
콜먼은 형에게 "모르겠어.…………. 좋은 학교에 가고 싶어. 프린스턴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프린스턴 같은 학교에서 나를 받아줄 리가 없지."
"왜 프린스턴에서 너를 안 받아줘?" 형이 물었다. "성적은 괜찮잖아. 좀 더 열심히 하면, 좀 더 너를 채찍질하면 그 수준에 이를 수 있어, 노력해서 손해 볼 건 없지."
"그 순간 제 생각이 확 바뀌었죠." 콜먼이 말했다. "그때부터 ‘뭐하러?‘에서 ‘왜 안 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말 좋은 대학에 못 갈 수도 있지만 노력하면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거잖아요."
그 이듬해부터 콜먼은 학업에 매진했다. 11학년에 올라와서는 전과목에서 A를 받았다. 졸업반이 된 콜먼은 컴퓨터공학 및 공학 분야에서 전국에서 가장 순위가 높은 대학들을 찾아봤다. 그 결과 희망 대학이 프린스턴에서 MIT로 바뀌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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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성장형 사고방식 growth mindset이다. 이를 강화시키려면 긍정적 인식에 성장을 자극하는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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