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1부(부제:상상도 하지 못한 일)에 해당하는 절반 정도의 분량을 읽으면서 눈물이 자동분출되는 경험을 했다. 왜 안그렇겠는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그렇다 치자. 누구나 그 정도의 준비는 하니까. 그리고 내 감정의 둑이 얼마나 부실한 시공으로 지어졌는지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눈물은 마땅한 일이었으나 내가 꼭 엄마라서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 어느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났고 그 주범인 학생은 자살했다. 그 학생의 엄마는 사건 이후 16년 동안의 기억과 기록을 되살려 글을 썼다. 그 글이 책으로 나왔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이 책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면 이 정도일텐데,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마음의 파고는 이미 격랑이 되었다.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에 대해 먼저 얘기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 힘에 굴복하는 나를. 어떤 태도인지도 모를 그 어떤 태도가 필요해서 난 일단 찾았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겸허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노력해야 하는 태도였다. 여기, 그러니까 이 책, 하나의 끔찍한 사실이 존재하고 그 위에(안에) 어쩌면 더 끔찍한 진실이 있을 거라는 호기심. 나에게 아주 쉽게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이 호기심이었다. 강력하다 못해 천박할 수밖에 없는 호기심. 이 책의 중심에서 회오리처럼 돌고있는 가독성의 진실, 그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아, 난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섬뜩한 시선이 나를 이끌었고 결국 나도 한패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건가. 놀랍다. 정말 놀랍..은가. 아니다. 놀랍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사실이다. 놀랐다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실이다.(내가 내 감정을 잴 때 사용하는 잣대가 있는데.. 좋든 나쁘든 옳든 그르든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고 신경쓰지 않는다. 동물적 판단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게 참 늘 보면 위험천만한 것이어서 일생에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그냥 즉물적 판단이라고 해둘까. 아무튼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다는 것.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잣대라고나 할까. 무슨 잣대가 그러냐, 그건 잣대라고 할 수도 없다, 해도 이게 내 잣대요, 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판단이든 사전에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를 이끄는 방식에 대해, 내 손을 붙들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따라가는 그곳의 진실에 대해, 난 주목해야만 했다. 그러던 끝에 난 무언가를 찾고야 말았는데, 그걸 말하려니 너무너무 두렵다. 그냥 이대로 리뷰를 끝내고 싶다. 결국 난 이도저도 아닌 감정의 낭비, 시간의 낭비, 글자의 낭비만 일삼다가 끝내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는 거짓자백이나 하면서 이 글을 끝낼 공산이 크다.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감정의 격랑이 수습이 되고 눈물도 어지간히 말랐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이 책의 본격적인 진가가 드러날 것이라고 작심하고 책장을 넘겼다. 저자 수 클리볼드는 그러나 처음부터 당시의 정황들, 사건 이후의 완전히 달라진 삶, 아들의 범죄사실을 인정하기까지의 고통의 시간들, 아들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애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법적 소송과 경제적 파탄에 내몰리는 피말리는 일들(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 언급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과 다른 언론 보도를 대할 때의 분노, 세상의 질시와 비난을 견뎌내는 동안의 수치심과 슬픔과 공포, 자신의 삶에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무엇보다 아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게 건네는 솔직한 애도의 과정들까지, 이 모두를 풀어놓는다. 이미 1부에서 원없이 다 쏟아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 어떤 할 말이 더 남았나 들여다 보게 된다.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고 그건 추악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 너머에 이미 자살이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자살충동이 먼저였고, 그로 인해 살인이 일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너무들 쉽게 사이코패스니 괴물이니 하는 것으로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 클리볼드가 엄마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말을 하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말의 진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나의 의지가 아주 사소한 연민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이 모든 게 근거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실토가 될지언정 나는 밀고 간다. 그리고 다짐도 한다. 내 의지의 씨앗은 작은 연민이라고.(동정과 연민은 다르다는 전제하에, 연민이라는 말을 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과 시선이 어떠할지, 저자야말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는 모험과도 같은 이 일에 뛰어들었고 지난 16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의 상처와 고통(그녀 자신만의 고통은 당연히 아니다)에 대해 애도하고 또 애도한다. 그리고 그 애도에는 속죄가 따라 붙을 수밖에 없는데, 속죄에는 또 면책의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하지만 속죄와 면책은 그 시작부터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들이 저지른 죄값을 엄마가 치러야 한다는 것이 맞다면(누구 죄없는 자가 돌을 던져보라고 했을때 기꺼이 돌을 던지는 것과 맞먹는다면) 그 속죄의 길은 끝이 없다. 그만큼 잔인하다. 그녀는 덜 욕먹는 길이 그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녀는 속죄의 길'만'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면책의 길에 들어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면책은 택하고 말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녀에게 면책은 그녀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의 몫이다. 세상에는 속죄의 가치가 있고, 면책의 가치도 있다. 그럴 때, 그 면책이라는 것. 가볍다고 느끼고 무시하고 말 것이기 이전에, 그것과 동일선 상에 놓일 만한 새로운 좌표는 있을까. 이 책은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읽는 내내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녀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엄마로서 아들을 애도하지 못한다. 그것을 막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속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다. 이 책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애도를, 그 충분치 못한 애도의 과정을 어떻게든 회복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아니 매우 겸허한 항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7-01-1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가 두려워지네요.
리뷰를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요동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컨디션 2017-01-19 14:45   좋아요 0 | URL
표지와 제목이 왠지 마뜩찮아서 별 하나를 뺐는데, 정말 좋은 책이라는데 제 손목을 걸겠..(어쩌다 이런 표현을)..

몰아치듯 읽기에 좋구요, 아마 책읽는나무님이라면 폭풍처럼 쏟아지는 눈물콧물에 대비해 손수건 티슈 다 갖다놓고 읽으셔야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