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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살다 - 삶에서 소설을 소설에서 삶을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빌린 책이라 밑줄은 못그었고 약간의 필사를 하긴 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지만 필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자니 바보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필사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겪은) 필사는 어려운 게 아니라 괴로운 쪽이다.(뭐 그게 그건가) 암튼 내가 생각하는 필사의 괴로움은,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다거나 시간이 정말로 정말로 많이 걸린다거나, 해서는 아니다. 물론 그런 사소한(?) 이유가 괴로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나 자신인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어느 순간 불길한 전조를 띠며 커튼 뒤에서 날카로운 뭔가를 숨긴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과연 착각일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반드시 누군가의 책을 필사하고 있을 때다. 그래서 난 좀처럼 책을 필사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하다가 관둔다. 그렇게 쌓인 노트가...수백권이이라고 뻥을 치고 싶지만 살아온 내 인생이 그 정도로 성실하기라도 했더라면, 누구 말대로 뭐라도 되어있었으려나.(과연 뭐가 되길 바라는 것일까. 바란다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또 필사(?)를 해본다. 50쪽을 베낀 메모장을 펼친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내 소설의 현실적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칼보다 강하다는 잠언 속의 펜은 신문기자의 기사인지 모르겠으나 내 소설은 아니다.
'개'라는 말이 물지 않듯이 '칼'이라는 글자 역시 베지 않는다.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체계로부터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무는 개와 베는 칼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개'라는 말과 '칼'이라는 글자를 가진 사람들도 또한 다른 곳에서 행복하다.
저들이 현실 속에서 행복한 것처럼 이들은 다른 현실 속에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