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신비 -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이창헌 지음 / 대장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현대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배웠고, 또 그들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몰트만이라는 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나는 몰트만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를 비판하려 한다'고 밝혀 놓은 것을 보면서 몰트만이 과연 무슨 주장을 펼쳤는지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제가 배워왔던 것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이 아니라 속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속량'이라는 말은 적잖이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속량' 개념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신 사랑의 힘으로 인류를 건져내는 것은 아무도 만족하게 할 필요가 없지만, 역설적으로 모두가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저자는 원죄의 교리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에스겔18:2,20,25가 원죄 교리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고, 우리의 죄는 우리의 죄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죄의 문제는 반드시 대속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도출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들은 니케아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공의회를 통해 확정되어 왔는데, 대속과 원죄의 교리는 공의회의 확정을 받은 바 없는 교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원죄의 교리는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도입한 것이며, 대속의 교리 역시 소수의 카톨릭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도입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대속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에도 반대되는 교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인신제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희생의 자리에 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은 하나님을 위한 우리를 대신한 하나님 아들의 희생 제사가 아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님 아들의 희생 제사였다." 또 저자는 대속의 교리가 유럽의 개신교회들에 의해 폐기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담의 죄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그렇게 가볍고 단순하게 취급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대속'과 '희생' 중에 오직 한 가지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개신교의 예수상 없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개신교인들의 주장 -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우상과 같다, 예수상 없는 십자가야말로 부활의 상징이다,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혐오감을 준다는 - 에 대해 저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은 결코 우상이 아니며, 예수상 없는 십자가는 결코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없으며(부활의 상징은 빈 무덤이지 빈 십자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상이 없는 십자가는 단지 사형틀의 의미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혐오감을 줄 지 몰라도,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예수상 있는 십자가 사진들을 함께 실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서 '예수상 없는 십자가가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말에는 공감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상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상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온 사람은 그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묵주나 목걸이에 달린 십자가들이 그 소유자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도구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앞 좌석 유리창 앞에 매달아 놓은 십자가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고를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또한 칭의 교리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한글 성경에서 '정의, 공의, 의'라고 다양하게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라는 단 하나의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래는 모두 다 '정의'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에는 모두 '정의'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또한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에 반대하기 위해 수동적 의만을 주장함으로써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능동적 의까지도 포기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믿음'은 '불신앙'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반대어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믿음'은 '순종'과 동의어로써 '믿음은 결코 순종의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최근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바울 신학의 새관점과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 가운데 충분히 옳다고 할 만한 근거들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외에 장래 일을 말하는 예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나 종말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도 들어볼 수 있었는데, 저자의 설명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는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으며, 세상의 종말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 중에서 '사랑'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장들은 거의 대부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자가 임마누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랑의 본질은 연대'라고 표현 것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나라가 임하는 것'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같은 말의 반복임을 지적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삼위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사랑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못한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통해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른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많은 깨달음도 얻었고, 저자의 정당한 비판을 통해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신학적인 전제가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랑의 본질은 연대'라는 지적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교훈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유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보수적인 신앙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읽어 본다면 지금까지 생각해 본 바 없는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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