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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 : 장편소설,성장 소설

배경 : 시간적-(본문에서는 어느 겨울)

       : 공간적-목포 근처의 어느 섬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줄거리 : 훈필이라는 아이가 있다. 훈필이는 은주를 좋아하지만 은주도 훈필이를 좋아한다. 어느날 훈필이네 염소가 시름시름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훈필이는 매우 슬퍼했다. 그러자 문뜩 어른이 되고 싶고 서울에 가고싶다는 것이 생각났따. 그래서 훈필이는 편지를 남기고 엄마돈을 훔쳐 가출을 했다. 먼저 목포로 가야하는데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면서 목포까지 돈 안쓰고 와서 점심을 그 할머니의 딸이 운영하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갈려고 기차타러간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없어져서 다시 할머니딸의 음식점을 갔는데 보고나니 눈물이 흘렀다.

 

 

 

 

 

 

 

 

 

생각한점  : 나의 생각한점은 할머니를 도와 배를 탔지만 못한것 같다. 아무리 돈을 아낄려고 해도 돈이 있으니 일단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기차역에서 다시 할머니의 딸네의 음식점을 보고 울었을 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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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and 그린이 : 안네 프랑크, 최동식

줄거리 : 안네는 1929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33년에 독일 에서 나치스와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자, 안네의 가족은 네덜란드 남쪽 으로 이주햇다. 그러나 , 1944년 8월 4일 안네의 가족은 한 네덜란드 사람이 독일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붙잡혔다. 안네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녀의 아버지만이 도망쳤고, 안네와 그녀의 언니 마르고트는 1945년 3월에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생각한 점 : 처음에 히틀러와 나치스가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시작됬을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이해가 가고 원작이 안네 프랑크여서 인지 더욱 실감이 났던것 같다. 그리고 안네와 그녀의 언니 마르고트가 얼마가 굶고 병으로 힘들었을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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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김유신의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595년 : 신라의 변방인 만노군 (지금의 충북 진천) 태수인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609년 : 열 다섯 살에 화랑이 되어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였으며, 특히 그가 이끄는 낭도를 용화 향도라고 하였다.

 

629년 : 김용춘을 대장군으로 한, 고구려의 낭비성 싸움에서 아버지 김서현을 따라 함께 출전하였다.그러나 고구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신라군이 후퇴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다.

 

644년 : 장국이 되어 백제를 공격, 가혜성 등 7개의 성을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리고 서라벌로 개선했다. 그러나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매리포성이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듣고, 백제군을 치러 나가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647년 : 상대등 비담과 그를 따르던 염종이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지혜로써 이를 진압하였으며, 또한 무산 등 세 성에 쳐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648년 : 백제의 대장 의직과 흑치상지가 신라의 대량성을 공격해 오자 특공대를 조직하여 백제의 장수 여덞 명을 사로 잡았으며, 악성 등 12개의 성을 빼앗았다. 또한 백제의 윤충이 지키는 전례성을 공격하여 20여 성을 빼앗고, 그 공로로 이찬이 되어 상주 대도독 겸 진서 대원수가 되었다. 649년, 백제가 좌평 은상을 대장으로 하여 다시 쳐들어오자 도살성에서 크게 무찔렀다.

 

654년 : 전덕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알천과 함께 김춘추(태종 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 : 신라 최고 벼슬인 상대등이 되었다. 또한 정병 5만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을 치고,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대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다시 의자왕이 피신해 있는 웅진성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당나라의 소정방이 신라까지 넘보려 하자, 당나라군에 대항하여 그들을 몰아 내고 백제의 옛 땅과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땅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로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673년 :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35년에는 흥무 대왕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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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2012-11-2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좀 쓸게요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심사임당의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04년 :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1510년 : 외가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씨와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1519년 : 글씨와 그림,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온 마을에 소문이 났으며, 1521년에는 아버지의 병환에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고 효를 몸소 터득하며 배웠다. 1522년에는 덕수 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했으며,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그대로 찬가에 머물렀다.

 

1524년 : 남편을 따라 한성 시댁으로 갔으며 첫아들 선을 낳았다. 그런 도중 강릉 친 어머니를 못잊어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강릉 북평 마을에는 어머니 이씨의 열녀 정각이 세워졌다.

 

1529년 : 맏딸 매창을 낳고 한성으로 돌아갔으며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 자리 잡고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낳았다. 그러다 또다시 친정 어머니의 병환으로 강릉길을 올라 학문과 그림에 몰두하며 남편을 공부시켰다. 1536년에는 검은 용이 방으로 들어오은 꿈을 꾸고 셋째 아들 율곡을 낳았다.

 

1541년 : 다시 한성으로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라는 시를 지었으며, 친정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에 <어머니 그리워>라는 시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자식 교육에 힘써 사서 삼경과 서예, 그림,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1542년에는 넷째 아들 우를  출산했다.

 

1550년 : 남편 이원수가 수운 판관의 벼슬에 올랐다. 1551년에는 1541년부터 살던 수진방에서 삼청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세곡 운반을 위해 평안도로 간 사이 몸져 누워, 같은 해 5월 17일 세상을 떠나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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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콜럼버스의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451년 :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품 공장과 식료품 가게를 경영했으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상당히 영특했고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1476년 : 포르투갈 남서쪽 앞바다에서 배가 해적의 습격을 받자, 판자 조각 하나에 몸을 의지해 목숨을 건진 후 리스본으로 갔다.

 

1478년 : 포르투갈로 가서 해도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 때,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설인 '지구 구형설'을 믿게 되었다.

 

1484년 : 포르투갈 국왕에게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여 성공하면 경제적 이익의 십분의 일을 달라고 말했으나 거절당했다.

 

1485년 : 에스파냐로 가서 다시 이사벨 여왕에게 탐험 계획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0년이 지나서야 지원 결정이 이루어졌다.

 

1492년 :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 호와 니냐 호, 핀타 호 등 세 척의 배는 팔로스 항을 출발해 70여 일 만에 산살바도르 섬, 쿠바 섬, 아이티섬을 잇달아 발견했다. 그곳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는 콜럼버스는 1493년 초에 귀항했다.

 

1498년 : 제3차 항해를 떠났으나 콜럼버스에 대한 질투와 반감 때문에 산토도밍고에서 체포되어 1500년 10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본국에 돌아온 콜럼버스는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은 밝혔으나 지위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502년 : 5월에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제4차 항해를 떠났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폭풍우로 배가 파손되는 등 고난을 겪었고,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말년에 가서는 병든 몸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되었다.

 

1506년 : 후원자이던 이사벨 여왕마저 죽은 후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여인숙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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