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 애니메이션 교과서 위인 W004
김현우 지음 / 윤진문화사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안녕하세요 오늘은 라이트형제들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겟습니다.

 

1867년 : 형 월버가 오하이오 주 데이튼 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1년 : 동생 오빌이 태어났다.

 

1887년 : 형제가 함께 주간 신문 <웨스트  사이드 뉴스>를 발행했다.

 

1892년 : 라이트 형제는 신문사의 문을 닫고, 자전거판매점인 '라이트 자전거 상회'를 개업했다.

 

1896년 : 독일의 글라이더 연구가인 릴리엔탈이 시험 비행 도중에 추락으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후로 비행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899년 : 비행기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고 상자형 연을 만들어 좌우로 흔들리게 하는 조종 방법을 실험하였다. 이것은 라이트 형제의  설계 이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1900년 : 사람이 탈수 있는 글라이더 제 1`2`3호를 만들었다.

 

1903년 : 12월 17일, 키티호크의 킬데빌힐 언덕에서 세계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했ㄷ.

 

1908년 : 프랑스에서 공개 비행을 한 뒤 1909년, 미국 육군의 비행테스트에 합격해서 아메리칸 라이트 비행기 제작 회사를 설립하였다.

 

1912년 : 5월 30일, 형인 월버가 세상을 떠났다. 형이 죽은 후 동생 오빌은 이 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1948년 : 1월 30일, 동생 오빌도 일흔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책을 읽기전에 라이트 형제가 진짜 형제가 아닌 줄 알았는데 진짜 형제 엿따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바이처 - 위인전기 29
이영준 지음 / 상서각(책동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오늘은 슈바이처의 생애에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겟습니다.

 

 

1875년 : 1월 14일, 독일의 알자스 지방인 카이저스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9년 :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들어갔다.  1899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1900년 :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2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904년 : 아프리카 원주민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05년, 서른살 때 의과 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1912년 : 헬레네 블레슬라우와 결혼을 하였다. 1913년에 의학 박사가 되어 파리 복음 전도회의 파견 의사로 적도에 있는 프랑스 령 랑바레네로 가서 의료  사업을 시작했다.

 

1917년 :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포로가 되어서 유럽으로 송환됐다. 그후, 문필 활동과 오르간 연주로 봉사 자금을 마련했다.

 

1924년 :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병원을 열고 의료 사업을 확장했다. 그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했을 때에도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약품 부족을 무릅쓰고 의료 사업에 전념했다.

 

1952년 :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무렵 세계 평화를 호소하고 원자력에 의한 세계의 위기에 모든인류가 함께 대처할 것을 역설했다.

 

1965년 : 9월 4일, 아흔 살의 나이로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나 병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는 슈바이처는 그냥 의사가 된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제1,2차 세계 대전이 겹처서 힘들기도 햇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3-05-30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용 좀 이용합니다ㅎㅎ

yyso 2018-11-2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내용 좀 이용할 게요~
그리고 이런 내용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링컨의 일생
김동길 지음 / 샘터사 / 1991년 5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링컨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겟습니다.

 

1809년 : 2월 12일 켄터키 주 개척지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 주를 거쳐 1831년부터 뉴세일럼에서 살았다.

 

1827년 : 오하이오 강의 나룻배 사공이 되어 일했다.

 

1831년 : 부모를 떠나 자립하였다. 이 때 뉴올리언스에서 노예 시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1832년에 일리노이 주의 주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우체국장이 되었다.

 

1834년 : 스물다섯 살 때 휘그당원으로 일리노이 주의 주의원에 당선되어 8년간 일하였는데 이 때 측량 기사를 겸했다. 1836년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며, 1842년에는 메리 토드와 결혼 하였다.

 

1860년 :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북부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남부민주당의 브레킨리지, 헌법연방당의 벨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861년 :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곧이어 4월에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1862년 사령관의 권한으로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전 노예를 해방한다는 '노예 해방 선언' 을 공포하였다.

 

1863년 :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 '국민의,국민에 의한,국민을 위한 정치는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1864년 :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군사적 활동에 힘입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또 남북 전쟁의 책임을 남북 양쪽 모두에 있다고 지적하며 박애와 관심을 가지고 연방을 발전시키자는 국민 설득을 하였다.

 

1865년 :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 관람 중 열광적인 남부파배우이 부스에게 저격되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웃겻던것이 1827년에 링컨이 오하이오 강의 나룻배 사공이 되엇다는 것이 웃겻엇고, 슬펏던것은 1865년에 부스에게 저격되어 죽엇다는 것이 슬프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무현 2015-03-0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무노무 이상하다
다시좀 써라
 
페스탈로치 교과서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12
신충행 지음 / 삼성당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위인에 대해서 알아볼려구 합니다. 혹시 페스탈로치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모르시다면 지금 함께 알아보도로 하겟습니다.

 

 

1746년 : 1월 12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인 1750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아홉 살 때인 1755년에 라틴 어 학교에 들어갔다.

 

1763년 : 취리히 인문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769년 : 취리히 인문 대학 보드머 교수에게서 받은 감화와 루소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농장을 설립하였다. 대학에서 같은 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안나와 결혼을 한 것도 이 시기이다.

 

1771년 : 노이호프에 농민 학교를 세웠으나 농장 경영에 실패해 가난한 어린이들과 고아들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780년 : 농민 학교 운영에도 실패하여 이 시기를 이용해 인도주의적, 종교적 색채가 짙은 그의 교육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은자의 황혼>을 저술했다. 뒤이어 1781년 에서 1787년동안엔 불후의 교육 소설<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를 썼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교육에 대한 그의 이상을 밝히고 있다.

 

1798년 : 슈탄스의 고아원 원장이 되었고, 이듬해 1799년에는 부르크도르프 공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804년 : 이베르동에 설립한 마지막 학교가 성공하여 페스탈로치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자신의 교육 이념 및 방법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성과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페스탈로치는 사회 개혁의 근본 기능을 전인적인 교육에서 찾았다.

 

1814년 : 프러시아와 러시아 황제와 회견을 하였고 1815년에는 아내 안나가 세상을 떠났다.

 

1826년 : 말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를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교육 이상으로 전인적, 조화적 인격 도야를 추구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1827년 2월 17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페스탈로치가 처음에는 농민 학교 운영에도 실패되어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를 저술하고 말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를 저술햇다고 한 사람인것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 1 -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이이화 지음 / 파란하늘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안녕하세여 오늘은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 1' 이라는 책에서 서희 장군과 소손녕의 담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겟습니다.

 

993년 거란은 중국 본토를 치기 전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해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한바탕 싸울 작정이었지만, 일단 먼저 화의를 제의해 보기로 하고 장군 서희를 거란 진중으로 보냈습니다. 소손녕은 이렇케 말하여 서희를 위헙했습니다.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옛 땅은 마땅이 우리 차지이다. 그런데도 그대들이 이를 허락 없이 침략해 차지하고 있다. 또 우리와 지경이 서로 잇닿아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우리가 이 까닭에 쳐들어온 것이다. 이제 땅을 떼어 우리에게 바치고 또 신하 노릇을 하면 아무 탈이 없을 거이다." 그러나 서희는 점잖게 소손녕을 타일렀다.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일 지경을 밝힌다 할진댄 그대 나라의 동경 지방이 다 우리나라 안에 있는 터인즉 침략하였다는 말은 당치도 않다. 또 압록강 안팎은 우리 지경 안인데도  이제 여진이 그사이에 끼어들어 살면서 간사를 부리고 모질게 굴어 그곳으로 다니기가 바다보다 더 어려우니 서로 사귀지 못함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그대 나라가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땅을 돌려주어서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도록 하면 어찌 신하노릇도 마다하랴."

 

 

이 이야기는 <고려사절요>라는 책에 나오는 대목으로 국경 문제를 밝히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인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우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7-2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3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