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너무 좋아하게 된 작가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이후 언제쯤 새로운 작품을 읽어볼 수 있으려나 했기에 이번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두께감이 좀 있는 책이라 빨리 시작했는데 막상 다 읽었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계속 읽고 싶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내가 싫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체, 반짝이면서도 착착 감기는 문장의 맛, 캐릭터성,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너무 좋아하게 된 작가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이후 언제쯤 새로운 작품을 읽어볼 수 있으려나 했기에 이번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두께감이 좀 있는 책이라 빨리 시작했는데 막상 다 읽었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계속 읽고 싶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내가 싫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체, 반짝이면서도 착착 감기는 문장의 맛, 캐릭터성,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게임이 뭐겠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Ι p.540

샘과 세이디는 각자의 이유로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의 휴게실에서 소년 소녀는 처음 만나 마리오 게임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고 이후에도 여러 게임을 하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어떤 오해로 인해 샘은 상처받고 세이디에게 절교선언을 했다. 시간이 흘러 샘은 하버드에서, 세이디는 MIT에서 공부하게 됐고 어느 날 하버드 스퀘어 매직아이 광고판 앞에서 재회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이디는 게임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고 샘 역시 여전히 게임을 좋아해서 세이디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동참해 함께 게임 제작을 하게 된다. 이 둘 사이의 중재자로 샘의 친구 마크스가 합세하면서 세 청춘들의 우정과 열정, 고민, 질투, 오해들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매직아이, 슈퍼마리오, 닌텐도, 동키콩, 다마고치 같은 추억의 게임들이 많이 나와서 정겹다. 게임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잘 몰라도 충분히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오랫동안 앓아 온 신체적인 고통과 한계로 인해 샘은 자신의 이상이 담긴 게임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몰두하는데 이해가 돼서 더 빠져들었다. 그들이 만든 '이치고'란 게임은 해보고 싶을 정도. 또 세이디가 그 시대 여성 게임 디자이너로서 느꼈을 차별적 시선 때문에 샘과 자신의 훌륭한 상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게임을 고집하는데 무척 현실적이었다. 대중적 성공과 예술적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도 좋았고 훌륭한 게임 디자이너이자 자신의 교수인 도브와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마크스에 대해서는 스포가 되는 것 같아서 쓸 수는 없지만 마크스로 인해 많이 슬펐고 결국은 훌쩍훌쩍하면서 후반부를 읽었다. 이 책은 사랑이 가득하지만 흔한 로맨스 소설은 아니다.

전엔 몰랐는데 작가가 한국계 어머니와 유대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소설의 세계에서 샘이 바로 그러하다. (한국인 이민 1세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피자 동&봉을 운영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안전하게 속하지 못한 채 외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혼혈 '애나 리'들의 삶도 놓칠 수 없다. 자살한 여인 '애나 리'와 싱글 맘이자 배우로서 살아가려고 고군분투하던 샘의 엄마 '애나 리'(대타로 뽑힌 방송의 전임자의 이름도 '애나 리') , 마크스의 엄마는 일본계 미국인인 애나 리.(마크스가 친구 샘에게 그렇게도 헌신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ㅠㅠ) 마크스의 엄마는 자신의 본명이 애란이라고 했는데 실제 작가의 어머니 이름이라고 한다.

살면서 대체로 샘은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그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로 보였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일단 누군가를 사랑하면, 듣기 지겨워질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 말이 의미가 닳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한다. 안 그럴 이유가 있는가? Ι p.615

이 소설 속에서 샘은 지치지도 않고 세이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무 귀엽고 좋았다. 파트너를 읽고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세이디를 구하기 위해 세이디가 좋아하는 <오리건 트레일> 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었던 샘. 그 게임 세계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파트는 무척 독창적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훌륭한 파트너이면서도 자주 오해하고 자주 싸웠다. 생각해 보니 그런 그들에게 마크스는 '봄날의 햇살'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살펴주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진심 어린 존재. '마크스가 마크스였기 때문에 샘과 세이디는 샘과 세이디일 수 있었다.' (p.501)를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책이 끝날 때 책이 끝난다는 아쉬움만큼 마크스가 그리웠다. 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뜨겁고, 슬픈 이야기를 다들 읽어봤으면 한다. 아,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와 양윤옥 번역가의 조합만큼 개브리얼 제빈과 엄일녀 번역가의 조합도 너무나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다. 표지도 읽고나서 보니 딱 이 소설 그대로다. 영화화 된다고 하는데 고작 두시간으로 괜찮을까? 미니시리즈 형태로 드라마면 좋을텐데.

* 도서지원

*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실력이 훌쩍 도약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이 이기심과 원한과 불안으로 똘똘 뭉친 독종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이디는 비범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의지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행복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 P604

하여간 나는 그쪽 세계가 더 좋아요. 완벽해질 수 있으니까. 내가 완벽하게 만들었으니까. 현실 세계는 마구잡이식 재난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잖아요. 늘 그렇죠. 현실 세계의 코드에 대해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젠장 하나도 없잖아.
- P532

마크스가 마크스였기 때문에 샘과 세이디는 샘과 세이디일 수 있었다.
- P501

은 O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상의 기초적인 오류였고, 샘은 머리 뚜껑을 열고 두뇌를 꺼내서 그 불량 코드를 삭제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인간의 두뇌는 애플의 맥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다.
- P306

마크스는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독서가였고, 그에게 세이디는 마치 여러 번 읽어도 좋은 책, 항상 새로운 뭔가가 튀어나오는 책 같았다.
- P1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로리 넬슨 스필먼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원제 : The Star-Crossed Sisters of Tuscany (2020))





폰타나 가문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가 있다. '이 가문의 둘째 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만날 수 없다'라는 저주다. 이 가문의 둘째 딸인 에밀리아와 루시는 어느 날 이 가문에서 거의 내치다시피 한 포피 이모할머니가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계획한 이탈리아 여행에 동행해 줄 것을 부탁받는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하지만 포피는 자신과 여행에 동행하면 가문에 전해져내려오는 저주가 깨질 거란다. 도대체 이 여행은 무슨 여행일까?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결국 포피 이모할머니, 에밀리아, 루시 셋의 이탈리아 여행이 시작된다. 알고 보니 포피는 젊은 시절 리코라는 동독 남자와 사랑했지만 냉전이라는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든 번째 생일에 사랑을 약속했던 성당에서 다시 재회하기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 일정 동안 포피는 리코와의 사랑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준다. 에밀리아와 루시는 황당했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이야기의 결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포피가 뇌종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포피와 리코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파티시에로 일하며 저주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고 자신했던 에밀리아와 저주를 믿기에 그것을 꼭 깨길 원해 남자에게 집착하던 루시는 이 여행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억눌러왔던 자신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자신의 가능성과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의 이탈리아 여행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포피 할머니와 리키는 재회할 수 있을까? 포피의 언니이자 폰타나 가문의 권력, 에밀리아의 가능성을 억눌러왔던 로사 할머니와 얽힌 사연과 비밀까지!! 책이 끝날 때까지 이야기는 꽉 차 있다.



결국은 해피엔딩이었다. 난 해피엔딩이 좋다. 어쩐지 읽는 보람이 있달까? 따로 스포하진 않겠지만 해피엔딩이란 말은 적고 싶었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젊은 시절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한 독자와의 편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 딸들에게 내려진 저주라는 허무맹랑하고 판타지스러운 소재는 결국 실재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저주에 지레 겁먹고 가능성을 애써 눌렀던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다. 중반까지 에밀리아와 루시는 너무 답답했지만 포피의 애절한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힘이 있었다.



도서지원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지음, 박미경 옮김 / 베리북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원제 :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

● 영화계의 전설적 요부 에블린 휴고, 세상을 떠나다!!

50년대엔 스타일 아이콘으로, 60년대와 70년대엔 섹시한 요부로, 80년대엔 오스카상 수상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휴고는 육감적인 몸매와 대답한 역할,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사로 명성을 떨쳤다. 일곱 번 결혼했고, 어느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았다.

최근에 이 작가 작품이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두 권 출간되었다. <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에 관심이 더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됐다. 이 책은 대출했고 <데이지...>는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으로 올라와 있어서. 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감정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다 읽고 난 후 어쨌든 '재밌었다'라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더 재밌을 것 같다. 영상으로 만들기 더없이 좋은 스토리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얘기해 보자면 (스포가 될 것 같아서 많이 말할 수 없다)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무명의 기자 모니크는 커리어도 가정도 순탄하지 않아 고민이 많은데 어느 날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여배우 에블린 휴고가 모니크를 지목해 인터뷰를 자청한다. 잡지 인터뷰는 핑계고 에블린 휴고는 아무에게도 노출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모니크한테 빠짐없이 다 이야기하기로 하고 모니크는 그걸 쓰되 그 자서전을 모니크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기회까지 준단다. 도대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모니크는 일단 다시없을 그 기회를 잡기로 한다.

모니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에블린 휴고는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일생에 걸친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히 그녀의 일곱 남편들과의 스토리도 말이다. 섹슈얼한 이미지의 할리우드 여배우의 일생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시끄럽다. 초반의 흥미로움에 더해 진행도 빠르고 재밌지만 중반쯤 가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너무 노골적이어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50년대 전후 배경으로 바닥에 있던 여성인권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여성의 자기결정권 같은 것들을 그냥 모조리 '다 넣자'라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니 오히려 그래서 컨셉이 확실해서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금 <여전히 미쳐있는>이라는 책에서 딱 동시대의 여성운동에 대해 읽고 있어서 더 뚜렷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중간에 다소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에블린 휴고의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끝까지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야기 자체는 재밌어서 페이지터너인 건 확실하다. 그녀가 왜 무명의 모니크를 지목했는지 알고 싶다면 꼭 끝까지 읽자.

화려함, 열정, 야망에 가려진 진실은 무엇일까?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은 과연 누구였고? 스포가 되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나는 해리를 좋아했는데 해리 때문에 너무 슬펐다. 에블린 휴고에 대한 내 마음이 완전한 연민도, 완전한 미움도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녀가 현실의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삶이 어땠는지 와는 별개로 누군가의 치열한 일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항상 먹먹함을 동반한다. 마지막에 원고를 완성한 모니크가 하는 말이 참 공감된다.

에블린은 매우 복잡한 여성이었다. (...) 어떤 날은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지만, 또 어떤 날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에블린은 이런 상반된 평가에 만족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순수한 숭배에도, 추잡한 스캔들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진실에만 관심을 뒀다. Ι p.541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군자(1941~2008)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생존자로, 종전 후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었던 백인 미국 남성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양공주나 튀기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동족의 차별적 시선을 벗어나 이주한 미국이지만 그곳은 또 다른 차별의 시작이었다. 다양성이라곤 없는 보수적인 남편의 고향 마을에서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특유의 생활력과 강인한 의지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며 두 아이를 키워냈다. 딸이 열다섯 살 되던 해, 조현병이 시작되어 모든 것을 접고 소파에 틀어박힌 채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자의 과거는 오랫동안 침묵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사회학자로 공부하던 딸 그레이스(저자)는 과거 엄마 군자가 겪었을 사회적인 맥락과 그녀를 조현병으로 몰고 갔던 온갖 인종차별적 언어와 폭력들을 되짚어 나간다. 이 책은 딸 그레이스가 쓴 엄마의 회고록이자, 전쟁 생존자, 한국계 미국인 가족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인 동시에 디아스포라 문학 그 자체다.

엄마에게도 그런 상차림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했다.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 엄마는 당신의 출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 p.345

​군자가 경상도 사람이어서 이 책에는 '답답어라', '함 묵자' 같은 방언을 볼 수 있다. '한번 주면 정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원 타임, 노 러브' 같은 말들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찌르르했다. 그 시절 여러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온 1세대 한인에게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던 군자. 음식이란 군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지촌에서 일할 때 처음 먹어보았던 미군들의 음식 '치즈 버거'는 기회와 가능성이었고 미국에서 힘들게 만들어 먹었던 김치는 군자의 고향과도 같았다. 그렇게나 몰두해 만들었던 쿠키와 애플파이는 미국에 녹아들기 위한 도전이었고 강인한 채집인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 만들었던 블랙베리 파이는 오롯한 자기 의지이자 삶의 의지였다.

​<버섯 여자>라는 장은 군자의 빛나는 매력과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던 장이고 웃음도 많이 났다. 그래서 더 슬펐다. 심장이 안 좋아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군자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집 근처 숲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로 어마어마한 블랙베리를 발견한 것. 블랙베리를 채집하는 과정은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냈지만 군자는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매일매일 채집량을 갱신했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물량과 가격으로 블랙베리 여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블랙베리 철이 지나고는 버섯 채집에 나선다. 버섯은 독성이 있기에 버섯에 대한 치밀한 공부를 마친 후 온갖 버섯을 채집하기 시작했고 블랙베리 여사답게 이번엔 진정한 '버섯 여사'가 되기에 이르는데 읽는 동안 너무 재밌고 웃음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너무 한국적인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대가족은 주말에 야외로 나갈 때가 많았는데 목적지에 가는 동안 여러 번 내려야 했다. 누구 하나가 '여기 쑥 많겠는데.' 하면 언제 그렇게 챙겼는지 각자 50원짜리 칼과 검은 봉다리를 주섬주섬 꺼내서 쑥을 캐기 시작했다. 요즘엔 무분별한 채집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이 예삿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채집량은 우리집 식구들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고모들에 삼촌들에 고모부들까지 있었으니까. 쪼그리고 앉아서 땅만 바라보며 쑥을 캐고 있던 식구들이 생각났고, 그 생각은 봉다리에 가득 찬 쑥으로 쑥떡을 해먹고 쑥국을 해먹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책에서 군자도 '지천에 쑥이 널렸네, 국 끓이기에 최고지'라고 했다. 너무도 한국적인 군자의 모습을 보니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겐 얼마나 큰 싸움이었을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시절에 거리를 두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 가족 내 권력 역학에 더 넓은 사회적 불평등이 반영돼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로, 아버지는 내 주요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했던 바로 그것, 내가 누리는 최상의 교육으로 인해,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깊고 넓게 벌어져서, 다시는 같은 땅을 딛고 눈을 맞추며 설 수 없게 되었다. p.276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레이스만큼이나 읽는 나도 참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레이스 자신도 어렸기에 자각할 수 없었겠지만 기지촌에서 어머니를 만나 미국에 데려와 아이까지 낳고 가족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세대가 속해 있는 사회적인 맥락 자체가 그러하기도 했겠으나 사회학을 공부하는 그레이스가 가족이 침묵해왔던 과거에 몰두할수록 아버지에 대한 혼돈은 분명 아픔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기회나 희망은커녕 온전히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채로, 어쩌면 평생을 생존자로 살아남는 데 힘을 다 써버린 군자는 더 이상 아무 기력이 남지 않았던 걸까?

나는 국에 밥을 말아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엄마는 바닥에 내려와 앉았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국밥을 떠먹었다. p.374

이후 집 안에서 은둔생활을 한 군자는 음식을 거부할 때가 많았고 강인한 매력으로 휘어잡았던 주방은 그대로 방치됐다. 그레이스는 어머니에게 찾아갈 때마다 H마트에 들러 한국 식재료를 산 후 엄마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만들었다. 소고기국, 콩국수, 찹쌀떡, 생태찌개를 해서 둘이 같이 먹었다. 소파에 앉지 않고 소파 앞 바닥에 앉아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게 그렇게 슬펐다. 그레이스가 자신을 더러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을 이젠 안다고 할 때도, 그레이스가 사회학자로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꼭 써달라고 부탁할 때도, 함께 마지막 생태찌개를 먹고 한국식 이불을 덮은 채 딸의 발을 조물조물 만져줄 때도 마음이 먹먹했다. 가족사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전후의 한국 상황과 이민자에 대한 미국인의 인종차별주의, 젠더화된 노동과 폭력, 정신건강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맥락까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고 싶다.


* 도서지원

*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우리가 옮겨 온 동네는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소위 구제되었다는 명목으로 이민자들에게 끊임없이 정신적 대가를 치르게 했던, 제국의 폭력으로 얼룩진 또 다른 장소에 불과했다.
- P20

식민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침묵당해서,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에요. 그 목소리가 얼마만큼 가치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P266

엄마가 나를 막으려 했던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당신이 탈출해서 과거에 묻어두려 했던 삶을 내가 미화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게 엄마의 삶이었을 수 있을까?
- P291

1945년 9월 미국은 일본군으로부터 군사기지를 접수했고, 주변 공창 지역은 이후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업소 집결지로 탈바꿈했다. 1950년대 기지촌 업소들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먹고살기가 어려워졌거나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시골 소녀들을 끌어들였다. 1960년대 들어 한국 정부는 미군만을 위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를 공식적으로 관리하기에 이른다.
- P293

엄마는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의 고향에 녹아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미국 요리에 숙달됨으로써 스스로 그곳에 동화되려고 노력했다. (...) 엄마는 미국식 요리를 메시아를 따르기라도 하는 듯한 열성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 음식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대신 엄마는 한국 음식을 몰래 먹는 법을 익혔다.
- P318

치즈버거는 생존과 종속의 복합적 상징물이었고, 한국인들이 굶주리는 와중에 미국인들은 남겨서 버릴 수도 있는 사치품이었다. 엄마에게 치즈버거는 미국이 줄 수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 P434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23-07-2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골고루 많이 보시네요~
나는 여행의장면 책 보고 있어요~
알라딘에서 최은영 작가님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예약판매 해 났어요~ㅋ
 
미드나잇 스완
우치다 에이지 지음, 현승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때 좀 더 아무 생각 없이 나기사의 손을 잡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한 적이 있다. 그때는 뭔가 하려고 나서면 그 행동으로 인해 나기사가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나기사가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p.282-283


중학생 소녀 이치카는 아빠의 얼굴도 모른 채 엄마의 방치와 학대 속에서 자랐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녹록지 않은 삶이 엄마와 이치카를 더욱 힘들게 했다. 주변에서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머니는 도쿄에 있는 삼촌 나기사에게 한동안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도쿄에 도착한 이치카 앞에 자신을 데리러 온 삼촌은 어째선지 여자였고 서로가 불편하고 낯선 상황에서 이들의 동거는 시작된다. 사실 나기사는 아무도 모르게 트랜스 젠더가 되었고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업소에서 쇼걸로 일하면서 수술비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치카는 친구도 없고 웃을 줄도 모르는 아이지만 딱 하나, 좋아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공원의 한 할머니에게서 배운 발레. 집 근처 발레 스튜디오의 레슨 소리에 이끌려 몰래 수업하는 걸 지켜보던 이치카. 미카 선생님은 이치카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봐 주었다. 이 발레 스튜디오에서 만난 부잣집 소녀 린, 친구가 되고 이치카가 계속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등 가깝게 지내지만 결국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발레를 하고 있다는 걸 나기사에게 들킨다. 나기사는 가뜩이나 귀찮을 일은 떠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까지 만드니 더 마뜩잖다. 하지만 이걸 계기로 나기사는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는 이치카의 빛나는 재능을 알게 되었고 또 조금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구멍을 이해하게 되었다. 평생을 자신은 여성이라고, 남은 생이 얼마든 여성으로 살고 싶은 나기사. 수술을 한다고 해도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이치카의 아픔을 이해하고 이치카가 훨훨 날 수 있도록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해주고 또 꿈을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먹자 나기사의 삶의 의지도 확고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치카의 엄마가 이치카를 데리러 오는데...


나기사가 밤무대에서 추던 백조의 춤을 이치카가 추는 장면이나 나기사가 밤무대에서 사용하던 머리 날개 장식을 이치카의 머리에 씌워주던 장면, 공원에서 이치카가 연습하는 모습을 나기사가 지켜보던 장면이 좋았다. 이치카의 재능을 알아보고 끝까지 도움을 주었던 미카 선생님도 아름다웠다. 이치카의 친구 린의 결말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마음 아픈 건 나기사였다. 그냥.. 다 읽고 나서는 눈이 시큰했다. 슬펐다. 나기사가 뭐 대단한 걸 바랬던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만 들어서 슬펐다. 이치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그의 삶이 그랬고 너무도 가혹한 마지막도 그랬다. 아무래도 음성적일 수밖에 없는 트랜스 젠더의 직업적인 한계나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악순환으로 더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경이 그랬다. 나기사가 이치카를 위해 짧은 머리를 선택하고 작업복을 입은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또 그랬다.


이 책이 나왔을 때 영화화된 작품이란 걸 알고 영화부터 봤다. 영화에서는 쿠사나기 츠요시가 나기사로 열연했는데 영화도 괜찮았지만 책에서 아무래도 인물들의 생각들이 좀 더 많이 표현되어서 감정이 잘 쌓였던 것 같다. 이치카를 연기한 배우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없는데 정말 팔다리가 길쭉길쭉하니 발레를 하던 사람일까 생각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보다 책을 덮었을 때 여운이 더 진했다. 먹먹하다.



* 도서지원
*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기사가 어른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 P102

너무 가까운 거리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비슷하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비슷한데 왜 몰라주나 싶어 괴로울 때 또한 많았다. - P110

이게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치카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싫은지, 싫지 않은지는 알아도 행복한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게 그런 감정일지도 모른다. 가슴 언저리가 서서히 따스해지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그런 순간. - P147

맞아. <백조의 호수>는 비극이야. 나기사의 귀에 노인의 말이 암시처럼 울려 퍼졌다. 당장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백조로 돌아가야만 하는 때가 분명히 온다. - P182

그때 사오리는 각오했다. 아무리 높은 벽을 쳐봐야 날개를 가진 자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 P271

나기사 씨를 위해서, 나기사 씨를 잊어줘.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