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 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줄리언 반즈는, 소설 속 위 구절처럼, 주인공 세 남녀의 사랑과 기억, 죽음을 통해 개인의 역사(과거),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그 역사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 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제 사고 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애드리안의 죽음과, 애드리안 아들의 장애라는 비극적 결과는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걸까? 멋대로 지껄이고 저주의 막말을 퍼부은 토니도, 지나치게 똑똑해서 원치 않게 주어진 삶이란 선물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애드리안도, 그리고 그런 애드리안을 사랑했던 베로니카도, 그 누구도 책임이 없음과 동시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한 이 느낌은 뭘까. 그저 운명이라는 우연이 그들을 그 길로 이끌었으며, 그 길에 만약이란 전제는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아드리안이 일기에 썼던 만약 토니가... 다음에 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책을 다 읽고 나면 느끼게 된다. 문장 하나 하나가 놀라운 결말을 향해 치밀하게 미리 계산되어 쓰여졌다는 것을.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랄까. 뒤로 갈수록 더해지는 몰입도도 좋았다. 전작들에 비해 참신함은 덜하지만, 한 인간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역시 줄리안 반즈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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