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글쎄, 도무지 이런 남자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현혹되며, 감언이설에 녹아나는 사람들을 죄의식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은 그저 남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그들이 원했기에 그랬던 것 뿐, 악의는 없었다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이 소설은 매력적이지만 불길한 마법의 인간, 라요스를 평생 사랑한 에스터의 이야기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 경계조차 알 수 없는, 거짓말의 천재인 이 남자의 캐릭터를 별다른 사건과 장황한 묘사 없이도 탁월하게 그려낸 것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닌가 싶다. 때론 너무 얄밉다가도 또 마냥 밉지만은 않은, 라요스를 향한 복합적 감정이 일었다.

 

'그러나 일 년에 단 한 번 서는 번화한 시장처럼, 라요스는 순식간에 우리를 매혹시켰다.'

 

' 라요스는 거짓말로 시작해서, 자신의 거짓말에 감동하여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거짓말을 계속했으며, 끝에 가서는 다들 놀랍게도 진실을 말했다. 거짓말을 했던 것처럼, 진실도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다.'

 

'한계니 가능성, 선과 악, 그런 것들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소. 에스터. 우리가 하는 행위의 대부분 이성적이지도 않고 뚜럿한 목표도 없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았소? 무슨 일을 꼭 이득이나 기쁨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오. 당신 삶을 한 번 돌아보구려. 그러면 많은 경우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거요.'

 

'나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소. 미리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꾸민 일에만 책임이 있는 법이오. 의도에만 책임이 있소. 그러면 행위란 대체 무엇이냐고 묻겠지. 행위는 언제나 자의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거라오. 옆에 서서 행위하는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볼 수 밖에 없소. 에스터, 그와 반대로 의도는 죄를 진다오. 내 의도는 항상 순수했소.'

 

미움과 연민과 강렬한 매혹... 그녀가 그에게 느꼈던 감정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십년만에 돌아와, 그녀의 마지막 재산까지 요구하는 뻔뻔한 그를, 보기 좋게 한 방 먹여 뻥 차버리기를 응원 했건만, 바보 천치 같은 여자라 답답해 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마지막 결정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나도 그녀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어서 일까. 사랑한게 죄라고, 사랑의 약자가 된 그녀의 마음을 나도 한 때 가져 봐서일까. 처음 순간부터 라요스를 꿰뚫어 보았는데도 그의 손발이 되고 싶어 못내 조바심 쳤던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그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게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까.

 

'라요스는 시간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삶의 격렬함까지 되돌려 주었다. 나는 라요스가 변하지 않았고, 누누의 말이 옳으며, 우리가 그에게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나 자신의 삶이든 다른 사람의 삶이든 삶의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라요스, 거짓 투성이 라요스를 통해서만 이 진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그녀는 현재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원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용감하게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사랑에 책임을 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던 사랑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 꺼리로, 담담하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에스터의 사랑을 그려냈다. 마치 마음을 움직이는 정물화같은 느낌이랄까. 특히 작가의 깊고, 아름답고, 소박한 문장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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