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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ㅣ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꽤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킬과 하이드>와 <파우스트>의 짬뽕에 환상의 단무지를 살짝 얹어 놓은 느낌이랄까.
현실의 도리언과 초상화의 도리언이라는 선악 분리의 고전 테마 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는 대목이 흥미롭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도리언이 아니라 오히려 헨리가 아닐까? 마치 오스카 와일드의 분신같다. 실제로 내 주위에 이런 인간이 있다면. 그 잘난 체 하는 태도와, 허영기 가득한 과시욕이 꼴보기 싫으면서도 꽤 끌릴 것 같긴 하다. 아름답지만, 자신의 본성에 대한 성찰 없이, 너무 쉽게 감각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도리언보다는, 아니꼽긴 하지만 자신만의 개똥철학이 있는 헨리가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다. 조금만 자기를 죽였다면,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잘 살렸을텐데, 어느 순간 작품 속 헨리는 사라지고, 허영심에 가득 찬 잘난 작가의 목소리만 남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거부감이 들었던 게, 이 작품이 별로 였던 제일 큰 이유이기도 하고.
아무튼, 헨리는 순진하고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에게 감각만큼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쾌락을 추구하기를 부추긴다. 헨리 스스로가, 이 세상에 좋은 영향이란 것은 없으며, 모든 영향은 부도덕하다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 인간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 제일 큰 영향을 미치는 모순을 보여준다. 마치 도리언이 실험 대상인 양, 자신이 도리언 인생의 창조주인 양, 자신의 의해 변해가는 도리언을 관찰하면서 말이다. 헨리가 도리언에게 그랬듯, 작가도 독자들에게 작품을 통해 그의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한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 화가 바질. 그는 완벽한 피조물인 도리언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고, 걸작을 완성한다. 그에게 도리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명은 전적으로 도리언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으니까. 비단 예술가로서의 생명 뿐 아니라 목숨조차 결국 도리언에게 뺏기게 되니...
그 밖에도, 헨리에게 영향을 받은 도리언이 영향을 미친 많은 인물들... 도리언이 타락시킨 젊은이들과 여인들, 자살로 이르게 한 과학자와 약혼녀, 그녀의 동생까지.... 애초에 도리언 속에 내재된 악의 기운이 이미 있었다 하더라도, 헨리로부터 촉발된 분별없는 쾌락의 추구와 무책임함. 즉 헨리의 영향력은 도리언을 통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면서 여러 인물들의 삶을 바꿔 놓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엄청난 파급력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
<책 접기>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고유의 영혼을 강요하는 것이니까. 결국 그는 자기 본래의 열정을 불태우지 못하게 되죠. 그의 미덕은 그 자신에게는 진정한 것이 아니게 되고요. 그의 죄악조차, 만약 죄악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면, 빌려온 것이 되는 셈이지요. 그는 다른 누군가의 음악에 맞춰 메아리를 울리게 되고,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닌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게 되니까요. 인생의 목적은 자기계발이거든요.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인 셈이라오. 오늘날 사람들은 본래의 자기 자신을 겁내고 있어요. 그들은 가장 지고한 의무를 잊어버린 거죠. 자신의 자아를 소유하는 의무를 말이죠. 물론 그들은 자비로운 사람들이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지에게도 입을 것을 주니까. 그래도 자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헐벗는다 말이오. 우리 인종에게 용기는 사라져 버렸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