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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45세를 일기로 사망한 한 남자.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다. 영리하고 활기있고 사교성 있으며 예의 발랐고, 자신의 의무는 엄격히 실행했다. 젊어서도 일정한 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욕에 몸을 내맡겼고, 좋은 가문 출신의 사랑스럽고 예쁜 여인을 만나, 사회가 용인하는 결혼을 했으며, 적절한 수완을 발휘할 줄 아는 성실한 판사였다. 바라던대로 높은 연봉을 받게 되자 저택으로 이사해 집도 꾸미고, 명사들을 초청해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생활도 잠시, 옆구리 통증으로 시작된 정체 모를 병으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그 육체적 고통에 더해, 아내와 자식마저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동정 하지도 않는다는 정신적 고통의 이중고 속에서 외롭게 죽어 간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작품들이 사랑에 관한 것들이라면, 이 작품은 확실히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한 남자의 일생을 되짚어 보고, 죽음에 맞딱드린 자의 희망과 공포, 원망과 좌절의 엇갈리는 복잡다단한 심리 상태를 그려낸다. 또한 남편과 아버지, 동료의 예정된 죽음을 알고도 곧 괜찮아지리라는 식의 기만적 태도로 무감각하게 받아 들일 뿐, 그의 죽음이 자신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에만 오로지 관심을 보이는, 이기적이지만 또 우리의 실제 모습일 수도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주변 인물들도 부각된다.
애정 없는 부부 관계의 아내는 형식적으로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 할 뿐이며, 사랑에 빠진 딸은 그 와중에 어떻게 남자의 청혼을 받아낼지 골몰해 있고, 장례식에 초대 받은 동료들 조차 지루한 장례를 얼른 끝내고 카드 놀이를 할 생각 뿐이다. 단 한 명의 하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각자 자신의 생활에 몰두할 뿐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이반 일리치는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신에게 묻지만,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죽는다. '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의 평범한 삶은 지금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무슨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그런 벌을 받아야 한다 말인가?' 나 스스로도 궁금해졌다.
이반 일리치의 자문자답을 통해 톨스토이가 어렴풋이 제시하는 것은, 그가 자기 마음속의 희미한 움직임을 몰아내고 좇았던, 일도 생활도 가정도, 사교나 근무상의 흥미 같은 것들도 가짜였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진짜 마음 (진심)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맺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외롭게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설사 그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말 그대로 아파 죽어가는 사람 아닌가. 어쩌면, 그런 사람에게조차 지극히 기만적이며 (가짜 마음) 무관심할 수 있는 그의 주변인들의 존재가 진짜 무서운 사실이며, 무서운 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죄 지으며 가짜 삶을 살면서도, 모든 면에서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굳게 믿지만 결국 고통의 순간엔 아무도 없이, 배신감과 고독 속에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그들 혹은 우리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불쌍하니 괴롭히지 않도록, 자신이 죽음으로써 그들을 구해주자고 생각하고 마지막엔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반 일리치의 임종을 통해, 결국 톨스토이는 전 인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별다른 개연성 없이 따뜻하게 급 마무리 하려 한 점이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평범함 속에 감춰진 인간의 자기 기만과 허영,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심각함을, 죽음이라는 극적 계기를 통해 잘 드러낸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