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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
R. 벅민스터 풀러 지음, 마리 오 옮김 / 앨피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상물 <시대정신>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잘못된 통화체제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거대 자본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전략/전술들을 써 왔는지 보여주는 충격적 실례들 -예를 들면 9.11 테러, 남미 지도자 암살 등- 을 봤을 때, 믿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나 사실처럼 보이는 가려진 진실(?)의 등장 앞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원의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탐욕을 낳고, 탐욕에서 비롯된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자원의 불평등 배분이 인류를 불행케 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위 '비너스 프로젝트'인데, - 뒤엔 명칭을 바꾸긴 하지만- 기본 골자는 현대 과학 기술은 이미 대체 에너지 개발이 가능한 수준이며, 합리적 이성으로 기존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한다면, 모든 인류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지성(과학 기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인류의 미래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세 암흑시대와, 공산주의가 무너졌듯 자본주의도 최종의 답은 아니며 인류는 여전히 더 나은 체제로의 발전 과정에 있다는 생각, 정치가들 없이도 세상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기존 체제 안에서 개선점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의 건설을 주장하는 급진적 생각, 이 모두가 실현 가능 여부를 떠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엔트로피 법칙, 멜서스의 인구론, 다윈의 적자생존 등에 근거한 자원의 희소성(고갈)에 초첨을 맞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합리적 지성과 과학기술에 의존한다면 자원의 부족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과, 자동화에 대한 긍정적 관점, 즉 컴퓨터로 인해 인간이 일자리를 잃는다 해도, 대신 인간은 여가를 즐기면서 연구 개발에 몰두하여 고부가가치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는 생각 등 여러 가지면에서 '비너스 프로젝트'의 철학과 닮았다는 인상이 들었다.
국경과 민족이라는 국지적 사고를 벗어나 인류는 모두 지구라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 진정한 부에 대한 새로운 정의, 물질적 우주와 정신적 우주에 대한 과학과 철학을 접목한 고찰, 1960년대에 이미 전지구적 지배 세력으로서의 컴퓨터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 등 여러 가지 재밌고, 신선하고, 감탄한 부분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전문화'를 인류 멸종의 가능한 원인으로 보는 시각과, '대해적'이라 칭한 해상 세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기존 상식 - '대해적'들은 왕과 귀족의 비호와 경제적 후원 아래 명령을 수행한 '을'의 존재였다 - 을 뒤엎고, 실제로 세계를 지배한 것은 모험심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분포된 각종 자원의 위치와 항해술, 측량술 등의 고급 정보를 독점하고 외환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차지한 해상세력이었으며, 왕과 귀족들은 이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는 꼭둑각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이는 현재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실질적 지배 세력은 오바마 대통령도 국제기구의 관료도 아닌 거대자본 즉 다국적 기업이라는 현재 상황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정말 돈이 되는 종합적 정보는 해상 세력들만 독점했으며, 그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도록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가 설립되었지만 단편적 지식의 교육에 그쳤고, 결국 이런 전문화 현상은 실질적인 고급 노예 제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학교에서 행해지는 획일적 교육과 노동의 분업화, 과중한 노동 시간등으로 종합적 사고를 할 기회도 시간도 갖기 힘든 현대인들과 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 하지만 일차대전 전후 급격한 산업 기술의 발달을 쫒아가지 못한 그들은, 그들의 강점이었던 포괄적 사고 능력을 점차 잃어갔고, 돈벌이에만 치중하다 대공황이 닥치자 결국 멸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 주장의 진위 여부와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미덕으로만 여겨졌던 '전문화'의 어두운 면과, 서로 협동하고, 남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의 이득을 추구하지 않는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