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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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어둡고 무겁고 꽤 진지한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처음엔 약간 흥분도 했다. 잘하면 이번엔 <희랍인 조르바> <1984> 같은 명작이 주는 깊은 울림 같은 것을 맛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론적으로 기대에 못 미치기는 했지만. 

 

프랑스(유럽)의 현대 사회 변천사, 철학, 과학등에 배경 지식이 풍부하며, 디스토피아류의 소설을 싫어하지 않고, 애정결핍의 경험이 있으며, 머리가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외모+ 물건(?)왜소 콤플렉스까지 있는, 인생에 회의적인, 중년 남성 독자라면 나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테니 일독을 강추한다.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미국의 히피 문화에 경도된, 성적 탕녀 제인은 씨 다른 두 아들을 낳게 되는데, 묘하게도 큰 아들은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 특히나 젊은 여성에 대한 집착과 육체적 노화에 대한 신경증- 을, 둘째 아들은 누구나 탐내는 아름다운 여자친구에게 조차 성욕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을 겪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 둘 모두 진정한 사랑을 어떻게 주고 받는지 모르는 일종의 사랑 불능자들이다. 이는 성적 방종은 또 다른 성적 기형을 불러올 뿐이라는 작가의 비판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며, 또한 세 명의 탕녀 -어머니, 두 여친들- 모두를 단호하게 죽음으로 단죄한다. - 특히 형제의 여친들은 모두 성기와 관련된 병으로 죽거나 불구가 된다.-

 

저자는 말한다. 경제적 경쟁은 공간에 대한 욕구의 은유고, 성적 경쟁은 시간에 대한 욕구의 은유라고. 쉽고도 명쾌한 분석이다. 이 두 가지 치열한 경쟁 중, 저자는 성의 경쟁에 초점을 맞춰 ,현대 사회의 가족 해체, 인간 소외, 잔인한 폭력성등을 해석한다. 철학, 종교, 과학 -칸트, 콩트, 니체, 양자역학, 생물학, 물리학, 히피, 뉴에이지 등등-을 아우르는 작가의 풍부한 지식이 이런 해석을 떠받히는 뼈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개개인의 삶이 일정 사조를 가진 사회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일련의 원칙들 아래 인간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작가 나름의 진지한 시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소 현학적인 전개에 비해 뭔가 큰 울림을 주는 통찰이랄까, 주제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브뤼노의 여자친구가 불구가 되었을 때, 브뤼노는 그녀를 돌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나는 분노했다. 미셸 역시 우리 사회를 손댈 수 없을 만큼 병든 유기체로 보고, 기본 구성입자 -소립자-를 아예 바꿔버렸다. 과연 작가의 인간관은 이토록 지독하게 비관적이란 말인가. - 두 형제처럼 할머니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 그리고 그 원인을 소립자인 인간을 싸고 있는 거대한 물질 세계의 탓으로만 전적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브뤼노도 미셸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그들 스스로 그 길을 포기했다. 내민 손을 잡기만 하면 될 것을 왜 그러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화도 났다. 그들은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고 그래서 사랑할 줄 몰랐다. 그러나 언제나, 무엇에나 노력은 필요한 법이다. 엄마의 임종 앞에서 죽어도 싸다고 욕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식은 제대로 돌보지 않는 무책임함과 애정 결핍의 대물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요는 작가가 말하듯이, 성적으로 방탕한 엄마나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성적 방탕함 속에서도 서로를 제대로 사랑하려는 노력이 결핍된 부모와 자식이 문제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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