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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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 소설을 읽지 않다가 다시 좀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요새 누가 잘 나가는지 봤더니 박민규, 김연수, 성석제, 김영하 등이 대세인 것 같았다. 별 기대 없이 일단 맛만 살짝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 했다가 박민규한텐 나름 꼽혔고, 이 책도 일종의 맛보기용으로 주문했다. 달착지근하고 말랑말랑한 연애소설류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낯 간지런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 뒷면의 독자 서평 등이 별로 끌리지 않아 책장에서 꽤 오랫동안 굴러 다녔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이것들이 마치 가벼운 연애 소설인 척 독자들을 낚기 위한 떡밥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대한민국사>이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달달한 기분 전환용으로 골랐는데 웬걸, <대한민국사>를 읽었을 때보다 오히려 마음은 더 무겁고, 어쩌면 이 책을 읽으려고 내가 <대한민국사> 시리즈를 읽었나 할 정도로, <대한민국사>에 언급된 거의 모든 근현대사 - 일제시대 소작쟁의, 징병,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해방, 간첩조작, 광주학살, 6월 항쟁, 기자 해직, 해적 출판, 분신 정국, 김근태,권인숙 고문사건, 전대협 대표 방북, 간첩 조작, 파독 광부,간호사 등등- 나아가 나치학살, 라지브 간디 피살,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폭력적인 체제의 파도에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네 쌍 -나와 정민, 이길용과 상희, 베르크씨와 안젤라, 강시우와 레이- 의 표면적 사랑 이야기 외에도 등장 인물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나도 '나'처럼 이 책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고나 할까.   

솔직히 처음엔,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해, 등장 인물들의 삶을 굵직굵직한 한국 근현대사에 너무 인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며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거부감은 사라지고, 후반부엔 나름의 반전(?)까지 더해지며 오히려 뒤로 갈수록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보기 드문 작품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왠지 코바늘 레이스 뜨기가 떠올랐다. 김연수는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그만의 섬세한 코바늘 기술로 하나의 촘촘한 레이스를 완성했다.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 촘촘히 연결되어 떠졌고, 지금도 떠지고 있는 역사라는 거대한 레이스. 그 레이스의 폭력 속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해져버린 한 남자의 희비극적 삶과 연결된 나. 어쩌면 그 자리에 내가 떠질 수도 있었다는 우연성에 대한 오싹한 공포. 그래서 이 작품은 아무래도 내게 거대한 레이스 코뜨기의 이미지로 기억될 것 같다. 

한홍구식의 표현이라면, 이 책은 '경대친구' 세대인 작가가, 소설의 '나'를 통해 '한때 내가 살았던 어떤 뜨거운 시절에게' 던지는 작별인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을 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지말자는 메세지와 함께.   

체제와 폭력, 역사와 인간, 사랑과 희망을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었다.  

*책 접기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전태일의 친구들 사이에 내 자리가 없듯이 느티나무회에도 너를 위한 자리는 없는 거지.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그의 삶은 세차게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파도에 본의 아니게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무슨 의지가 있었겠으며, 만약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프락치 활동을 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런 논리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1980년대식의 죄의식일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런유의 사랑이란 누구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연민을 배설해야만 견딜 수 있는 시대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라고"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번 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면서 그들을 습격하고 복수하지만, 그리하여 때로 그들은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죽어가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세계는 전과 다른 세계다.....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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