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이방인
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곤조)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고양이를 사랑하고 세금을 싫어하는 수다쟁이 대머리 할아버지가 SF의 형식을 빌어 세상과 인간에 대해 풀어놓은 장광설'이 이 책에 대한 한 줄 요약 쯤 되겠다. 그리고 한 줄 더 붙인다면, '너무 무거워 누워 읽기엔 꽤 불편한 책'    

늑대 소녀처럼, 인간이지만 화성인의 손에서 화성인으로 길러진 마이클 벨런타인 스미스란 남자가 지구로 귀향해, 다양한 지구인들, 특히 쥬발 허쇼 - 발음상 완전 딱이다. '쥬발 허쇼'보다 더 쥬발 허쇼 캐릭터에 착 달라 붙는 이름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  라는 정신적 안내자의 도움으로, 서경식씨 표현으로 하자면 지구인과 화성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로서 겪는 정체성 고민을, 지구의 관습과 문화를 배우면서 극복(공감)하고, 마침내 '온세상 교회'라는 일종의 종교를 통해, '당신은 신입니다'라는 메세지를 지구인들에게 전하고 떠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화성이라는 무대, 막대한 부를 가진 남자 주인공, 영의 이탈과 초능력, 종교에 대한 풍자 등 커트 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와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데, 정치,사회, 종교,예술,전쟁 등에 대한 두 작가의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블랙 유머라는 표현 방식의 유사성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쥬발 허쇼의 입을 빌어 밝힌 그의 글쓰기 목적 - 고객들을 감동시키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은 적어도 나에게는 항상, 그리고 충분히, 달성되는 셈이다.    

강간을 당하는데는 여자 책임도 있다는 둥, 여자의 자유를 풀어놓은 고양이의 자유에 비유하는 둥, 딱히 페미니스트가 아닌 나도 할배가 도대체 왜 이런 망언(?)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책엔 여성 비하적인 부분이 많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독립적이고 전지전능한 여성 캐릭터들을 충분히 접했는지라, 구지 남성 우월주의적 편향적 사고로 해석하지 않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 강한 팬심 때문인가?   

역시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와핑이나 쓰리썸같은 파격적 성관계가 등장 하는데 이 작품에선 그 행위의 의미나 동기를 좀 더 심화학습(?)하여, 구지 '편협한 중산층 마인드로 무장한 엄격한 도덕률'이라든지, 몸에 배인 관습적 선과 악의 무의미함 따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가장 친밀해지는 방법으로서의 섹스를 열린 맘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해준다. 특히 종교가 오리지널한 생각 없는 사람들이 케케묵은 속임수를 가져다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다음 새롭게 칠을 해 벌인 사업이란 것을 보여주는 그만의 다양한 풍자들 - 교회에서 슬롯머신 기계를 돌려 잭팟이 터지게 한다거나, 갖가지 쇼의 기술을 동원하는 예배들 등등- 을 읽고 있노라면 그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나다가도 한편으로는, 종교라는게 뭐 그리 신성한 것이라고, 구지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암튼 기분이 묘해진다.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은 욕구의 대리 만족과 함께 그 비웃음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되묻게 되는 뭐 그런 감정들.   

비록 허구이긴 하지만, 서로를 충분히 공감할 때까지 기다림을 채운 후, 때가 되면 물을 나누는 물형제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충만하고 행복한 느낌일까를 상상했다. 어쩌면 질투 없이 마음껏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완전히 공감하고, 신이라 칭송하며 온전히 믿고 아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랑이 곧 현실을 일깨워준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100% 공감이란 있을 수 없다고. 특히나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일 때 공감이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다른 주제들도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 내겐 인간 사이의 진정한 '공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안타깝게도 물형제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책 접기   

'허쇼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정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누구도 배고픔을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악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가장 소름끼치는 농담이야." 

"세상을 어지럽히는 헛소리 중에서도 최악은 바로 '이타주의'라는 말이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 고통스럽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설령 그 선택이 '희생'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탐욕을 부려 불편을 겪는 것을 모면해 보려는 수작일 뿐.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질 수 없으면 무엇을 취할지 결정해야 하는 거니까. 평범한 녀석들은 푼돈이 생기면 맥주를 마실까 자식 녀석한테 줄까 고민을 하지.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까 직장을 관둘까로 고민을 하고. 하지만 항상 피해를 최소로 하고 즐거움을 최대로 하는 쪽을 선택하는 법이네. 크게 보면 불한당이나 성자나 선택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왜 웃는지 알아냈어요. 그건 상처받기 때문이예요. 상처받는 것을 멈추려면 웃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올바름은 웃음 속에 있습니다. 나는 웃음이 고통과 슬픔과 패배에 대항하는...용감한 행위...나눔의 행위라고 공감합니다." 

"예쁜 소녀를 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네. 예술가는 예쁜 소녀를 보고 거기서 미래의 노부인의 모습을 볼 줄 아네. 그보다 나은 예술가는 노부인을 보고 거기서 과거의 예쁜 소녀의 모습을 볼 줄 알지.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노부인을 보고 그녀를 정확하게 묘사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거기서 과거의 예쁜 소녀를 보게 한다네. 그뿐이 아니네. 약간의 감수성만 있으면 누구나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영락한 육체 속에 갇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지. 그렇게 가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가슴 속에는 열여덟 살 소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말이야." 

"모호함이야 말로 무능한 자들의 좋은 피난처라네." 

"유아론과 범신론이라. 그 둘이 만나면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지. 어떤 불편한 사실도 무시할 수 있고, 모든 이론을 화해시킬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어떤 사실이나 망상도 끼워 넣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솜사탕 같은 거야. 모든 맛이 들어있지만 실체는 없는." 

"그대는 신입니다...개인이 책임을 떠맡자는 것을 용감하게 선언하는 말입니다....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신을 자신들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고집했어요. 신의 이름을 빌어 나태한 우매함을 합리화하고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거죠. 노력은 본인 스스로의 몫이다. 모든 고난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는 말을 귀담아 듣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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