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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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기괴하고 - 고향에 묻어 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고난 2종 세트(물난리/불난리)를 겪으며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마차로 열흘 동한 여행하는 사건과, 기괴한 구석을 지닌 가족들 모두 - 주제는 애매모호하다. 작품 해설을 읽었다. 작품 해설자 스스로도 확실한 결론이 있는 건지 약간 의심 스럽다. 원전 자체에 대명사 사용이 많아 해석이 불분명하고, 다양한 상징과 은유 때문에, 외국 독자가 이해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뉘앙스다. 그렇다 해도, 번역 자체도 썩 매끄럽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구의 대화인지 불분명한 원칙 없는 줄바꿈 처리, 대명사의 잦은 등장, 그가 누구인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일일이 예를 들고 싶지만 귀찮으니 패스한다. 암튼, 원래 그렇다는 스타일과 번역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아무래도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작품 속 모든 사건의 발단을 제공하는 주인공, 즉 죽어 누워 있는 여자, '에디'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 속 등장 인물 각자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한 장 씩 나누어 서술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라쇼몽식 결말을 끌어내는 장치도 아니고 실험 정신 외엔, 그 효용이 뭔지 모르겠다. 암튼, '에디'편은 그 비중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취지에서인지 달랑 한 챕터 뿐인데, 그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세 번 읽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매질도, 앤스와의 결혼도, 목사와의 외도도 그 이유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고독하고 철학적인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 질 뿐. 제퍼슨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통해 남편에게 보복하고 싶었던 건 도대체 무엇 이었을까? 그리고 왜? 단지 고생 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을테고. 결론적으로 새 마누라라는 선물을 안겨 준 셈이 아닌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상적인 것은, 에디와 불륜을 저질러 쥬얼까지 낳게 한 목사 휘트필드이다. 그는 에디의 임종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에디의 집으로 가서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에디의 집으로 가던 도중, 홍수로 불어난 강을 건너다 구사일생한다. 그리곤 웃기게도, 그 징표로 자신의 영혼이 씻기고 용서 받았음을 스스로 선언한다. 에디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영혼은 평화 안에 머물렀고, 그녀의 영혼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벌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언뜻 <밀양>이 생각났다.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선포(?)하는 유괴범을 만나고 돌아 오면서 결국 쓰러지던 전도연. 고통의 시간 끝에 용서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유괴범을 찾아 갔지만, 유괴범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 받아 마음의 안식을 얻은 상태였다. 정작 고통 속에 몸부림 친 자는, 죄인이 아니라 희생자라는 이상한 아이러니. 휘트필드라는 웃기지 않게 웃기는 이 인간을 통해, 작가는 묻고 싶었던 것 같다. 죄 짓는 자와 용서하는 자와 복수 하는 자 사이의 영원한 숙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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