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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이야기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마음이 어수선한지라 일부러 책을 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마음 속에 미운 년놈 한 명 쯤 있지 않겠나. 약발이 떨어지고 증오의 감정이 또 스멀스멀 피어 오르길래 스님 글에서 위로나 좀 받고 싶었다. 경전에서 뽑은 글 한 토막에 스님의 짧은 덧글이 한 세트다.
일단 구구절절이 다 좋은 말이다. 근데 중생에게 바라는 부처님의 요구 수준이 너무 높다. 살생하지 말라 하셨으니 소고기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모기가 피를 빨아도 피보시 한다치고 대주고 있어야 할 것이며, 몸이 불구가 되면 내 업보 탓이려니 해야 하고, 부모 죽인 원수라도 원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용서해야 하고, 누가 나를 죽이려 해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 순순히 죽어줘야 한다. 경전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그런 초절정 자비와 수양으로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되었다. 물론 스님 말씀대로,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을 따지기 보다, 그만큼 무수한 겁을 통해 공덕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 한평생 끊임없이 선업을 쌓도록 노력하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말조심, 행동 조심, 생각 조심하라는 뜻일게다.
이 모든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르려면, 일단 윤회사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잘은 모르겠으나, 달랑 지옥,연옥,천국으로 구분하는 저쪽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원타임 사후 세계관(?)과 달리, 불가에선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의 여섯 세계가 있다 하고, 윤회를 반복하며 개인이 쌓은 업보에 따라 어느 방(?)에 입실할지가 결정되는 모양이다. 정말로 입실 기준(?)이 그런 것이라면, 부처님 말씀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세상에 공짜 점심 없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고' 뭐 이런류의 가치관을 현생 뿐 아니라 전생과 후생까지 확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억압하는 자, 착취하는 자, 고통을 주는 자에게, 적어도 현생에서는 아무런 저항이나 비난이나 증오할 여지 조차도 없는 것인가? 다 내가 전생에 지은 업보라고 생각하고 꾸욱 참는 수 밖에? 너무 피동적이고 어리석은 짓 아닌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었다 돌아와 속시원히 말해준 자 아무도 없으니.
불가의 인연설(?)이 사실이라해도, 촘촘한 인연의 그물에 갇혀 버둥거리는 중생들 -정확히 말해 나- 이 불쌍하기만 하다. 그 잔인하고 무서운 인연의 그물을 친 자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분노와 의심의 구름은 여전히 걷히지 않건만, 내가 만난 현생의 악생왕도 모두 다 나의 업보라고 애써 최면을 걸어본다.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하고 심란한 것 같기도 하다.
*책 접기
"바라나여 .... 즉 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생로병사와 독한 짐승의 침해 등 여러 원수가 많지만, 너는 그것을 갚을 수 없다. 그러면서 굳이 악생왕의 원수만은 갚으려고 하는가? 바라나여, 원수를 없애려거든 먼저 네 마음속 번뇌부터 없애거라. 번뇌의 원수야말로 끝없이 몸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원수는 아무리 악독할지라도 한 몸만을 해치지만, 번뇌의 원수는 청정한 법신까지 해친다. ......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원수가 생기는 근본 원인은 바로 네 마음속의 번뇌에 있다. 너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너를 침해하고 있는 번뇌의 도적은 물리치려 하지 않고, 왜 악생왕만을 치려고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