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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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 소설을 멀리하다, 우연히 읽게 된 김경욱의 단편 <위험한 독서>를 시작으로 <장국영이 죽었다고?>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와, <천년의 왕국>에 이은 두 번째 장편이다. 요즘 트렌드 답지 않은 '진지함'과 '무거움'을 장착한 그의 단편에선 뭔가 1990년대 소설의 삘(?)이 났고, - 어쩌면 책 읽을 당시의 내 우울한 기분과 맞아 떨어져 더 쉽게 꽂혔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괜찮은 작가를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는 설레임을 갖게 했다. 그 '진지함'이 '깊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사살키 위해 장편 <천년의 왕국>을 읽었고,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이야기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한 작품 더 콜!' 하던 차에, <하멜 표류기>를 찾아 읽으면서 적잖이 실망한게 사실이다. 단순히 참고 문헌이라 하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통째로 들어내왔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같은 역사소설류의 노골적 냄새도 풍기지 않으면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에, 미루어 왔던 <황금사과>를 읽었다. 일단 가독성은 좋다. 구성도 복잡하지 않고, 범인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 작가 특유의 문체도 글 읽기의 흐름을 쉽게 한다. <천년왕국>에서도 느꼈지만, 고어체를 아름답게 잘 살렸다. 작가의 풍부한 어휘력과 적절한 선택 능력이 짐작된다. 그러나 그 둘을 빼면, 뭐가 있을까? '이것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다'라고 미리 밝혔다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다 읽고 난 후의 황당함과 허탈함이란. 영화라면 '열린 결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는데다, 질색하는 편도 아니건만, 소설에서 열린 결말을 접하긴 또 처음이라. 내가 촌스러운건지, 다른 소설도 아닌 추리 소설에서 살인의 동기와 범인도 알려주지 않는 텍스트적 결말(?)에, '앗! 새롭다, 이런 참신한 시도를!" 보다는 '에씨, 머꼬 도대체!'라는 느낌이 먼저니 말이다. 뭐 이 책이 '장미의 이름으로'의 윌리엄 수사가 젊은 날 겪은 기괴한 체험기라는 가정하에 쓰여졌다 해도, 움베르토 에코 혹은 본물 유럽 작가들의 '중세 수도원을 둘러싼 비밀과 모험 이야기' 간판을 내건, 잘나가는 원조 식당 옆의 초라한 가게 같은 느낌이랄까? 그 일종의 열린 결말이란 것도, 혹여 결말을 그럴 듯 하게 마무리할 작가의 역량 부족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도서관에 갇혔다고 당장 죽을 것도 아닌데 그 귀중한 책을 다 태워가며 구지 그 밤으로 탈출하려한 화자는 어찌 이해해야 하며, 마저리 로빗과 스위니 토드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사순절 파이는 어찌 이해해야 하며, 마치 영화 <향수>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마녀 화형식 뒤에 보이는 군중의 육체적 쾌락의 탐닉은 어찌할 것인가. 어쩌면 이런 모든 것이 본물에서 놀아보지 못한 자의 태생적 한계는 아닐까 싶다. 이왕 쓰는 거라면, 원조보다 더 빠다 냄새나게 쓰던지, 그게 안되면, 차라리 우리가 본물인 그 무엇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나. 그의 장편에선 모두 실망 했지만, 그의 단편의 좋은 느낌이 아직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더 발전하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어쨌든, 이 책이 내가 읽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아쉽다.     

*책접기 

"향용 우리가 야만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대상을 업신여기는 행위는, 다만 기왕의 것과 다르다는 편견과 아집에서 비롯된 한낱 독선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한줌의 실체도 없는 공소한 개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여 보편이라는 것 또한 불면 날아가버릴 허망한 수사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양파란 묘한 것이다. 그 껍질을 벗기고 벗기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말이다. 껍질이면서 알맹이고 알맹이면서 껍질이다. 그 오묘함이나 허망함이 꼭 생과 같지 않더냐. 생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다보면 궁극에는 텅 빔, 절대 무만 오롯이 남게 되는 법. 사멸의 멍에를 지고 태어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고작 거기까지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 눈시울을 붉히며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 뼈아프게 확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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