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미술관 - 그리고 받아들이는 힘에 관하여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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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수대위의 까치'라는 책에 보면 사진에 적용되는 개념적 도구라고 합니다만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구원의 미술관'은 재일 한국인 2세인 강상중이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학교를

 

다니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와세다 대학 시절 한국방문을 계기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강상중이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지만 재일 한국인 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게되자 떠난 독일유학에서 만난 알프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

 

하게 된 이후 접한 그림들과 NHK <일요 미술관> 사회를 맏으며 알게된 작품들을 바탕으로

 

작가 나름의 '미의 진실'과 '인생의 심연'을 찾아 보고자 시도한 결과물 입니다. 작가는 10개의

 

테마를 가지고 각 장을 구성하고 테마에 맞는 작품을 선정하여 본인의 경험과 연계하여 앞에

 

언급한 푼크툼을 서술합니다. 책을 쓰던 시기와 우연히 겹쳤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하여 작가는

 

여러부분에 걸쳐 본인과 작품과 대지진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을 설명하는 책들과는 달리 객관적인 설명 보다는 본인의 느낌과

 

감정에 조금 더 충실합니다. 저 역시도 예술 작품이란 누구나 느끼는 공통적인 감성도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다른 느낌을 받을 수 도 있을 것

 

이고 , 같은 작품이라도 보고 듣는 시점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교수대 위의 까지'라는 똑같은 작품을 놓고서 이 책의 저자인 강상중은 "브뤼헐은

 

이 그림을 통해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고 싫든 좋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이 있지만,

 

동시에 재생도 있으며 희망도 있다는 메세지를 남기려 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P140."라고

 

했고, 진중권은 그의 책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저 교수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이다."라고 풀이했습니다. 각각의 해설의 옳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며 독자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을 통해 지식을

 

얻거나 위안을 얻거나 감동을 느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창작자의 손을 떠난 순간 느끼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일 것 입니다.

 

500년 전을 살던 그림 속의 남자는 제게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는 듯 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때까지의 미망에서 빠져나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19)

미술이나 회화처럼 `젠더 바이어스`(사회적 성차의 일방적인 고정화)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마도 페미니즘의 커다란 테마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 없겠지요." (P62)

"가장 어렴풋한 빛에야말로 모든 희망이 의거하고 있으며, 가장 풍요로운 희망조차도 희미한 빛에서만 나올 수 있다." (P124)

일단 커다란 재해나 사고 혹은 과잉 살육이 동반되는 전쟁, 우리 삶의 밑바닥이 꺼지는 듯한 공황,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면 `우리들의 생활과 의식을 심각하게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한계선 이전`(토마스 만 「마의 산」)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 합니다. (P126)

저는 `죽음의 잔해` 한가운데를 걸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졌을 때 `기도`할 수 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P169)

자기 자신이 자연과 해리되어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연과 일체화하고 싶고, 자연으로 귀화하고 싶다는 열렬한 소망이 생기는 것이지요.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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