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엔진이나 코끼리 심장이나 10억번을 뛰면 멈춘다. 운동을 많이 하면 건강하게 일찍 죽는다는 게 영 근본없는 낭설은 아닌 셈. 노화는 세포와 부품 레벨에서 일어난다는데 따라서 덩치가 크고 작은 건 문제가 아니고 미토콘드리아의 대사 작용을 바탕으로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존재는 물리적 가동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덜 쓰면 오래 쓴다는 걸 뭘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나 싶긴 한데 이론적 설명이 덧붙여지니 좀 근사해보이기는 한다.
인간관계를 국가 교통망이나 신경 회로의 특성과 비교해봐도 재밌겠다. 지금처럼 연결이 충분히 복잡해지고 고도화된 상황이라면 ‘의식‘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개인의 자아처럼 ‘무의식‘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판단은 개별적인 상황에서의 추론은 쉽지 않지만 ‘인간관계‘라는 기능에서 보자면 단순한 이항대립이나(대세를 따른다 거부한다) 몇 가지 행동옵션으로 압축해 낼 수 있을 듯 하고 이 옵션들의 조합 패턴이 특정 ‘임계치‘에 도달하면 ‘의식‘이 발생한다고 가정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 역사적으로 보면 구전설화, 속담, 상투적인 격언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틀을 구성해서 네트워크 상의 노드들(인간들)이 지정된 한계 내에서 운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드 간의 사회적 압력(그러면 못쓴다, 니가 사람이냐 등등)을 통해 사회적 자아에 통합되지 않는 노드를 ‘일탈‘로 규정하고 사회적 ‘정신병‘의 발병을 막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일도 가능하다.
2차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의 발발을 의식과 의식 혹은 무의식과 무의식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로 본다면 ‘광기‘와 ‘정신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보려는 시도도 해볼만 할 듯.
한편으로 라캉정신분석은 정신병의 발발은 구조에 내재된 것이므로 어떤 사회가 정신병 (전쟁)이 한 번 일어났다면 완전한 치료(제거)는 불가능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정신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신병적 구조가 요구하는 ‘판타지‘를 유지해야 안정화가 이루어진다.
좀더 상세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전쟁을 경험한(기실 그로 인해 성립된) 국가인 대한민국은 따라서 정신병적 구조가 자리잡은 개체로 볼 수 있겠고 아직 완전한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단군 판타지가 서로 다른 자아(고구려 신라 백제)의 통합과 안정화에 기여했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판타지가 존재한다. 박정희와 노무현. 이 둘은 상호배제하는 판타지로 지금으로서는 노가 우세해 보이지만 박은 절반의 세력을 어쨌거나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이항대립을 포괄하는 판타지를 세우므로써 안정화가 가능할지 혹은 어느 한쪽의 승리 혹은 공멸로 끝날 지는 모르겠다.
현재는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과거의 인물을 매개로 삼아 유지되는 듯 하다(이들을 까는 건 암과 동일한 노드로 취급될 것이다). 입헌군주제를 다룬 드라마의 등장도 시기적으로 흥미로운데..다룰 주제가 많으니 일단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