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다. <설국>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눈이 오면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가 된 것.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
겨울 눈이 오면 찾아오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반겨주는 여자.
<설국>은 제목답게 아름다운 눈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이야기, 연인인듯 아닌듯 싶은 이들의 미묘한 관계. 고마코의 따스한 손을 느끼면서 시마무라는 이별을 예감한다.
겨울 그리고 눈.
우리는 냄새나 시각으로도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만, 가끔은 촉각만으로도 특정한 기억을 떠올린다.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미묘한 두근거림.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종종거리는 발걸음들. 겨울은 춥고 움직이기가 싫은 계절이지만, 그만큼 누군가가 한없이 그리워지고 따뜻한 온기를 찾게 되는 계절이다.
눈에 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눈 내리는 밖을 바라보면서 동생과 코코아를 마시던 순간이다. 우리는 이 집에 이사온 지가 얼마 안된 상태에서 아마도 집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으리라. 추운 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눈이 쏟아지는 순간을 동생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십 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를 단순히 연인 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소설이 아쉬워진다. 대화를 나눌 대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는 마음.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고, 그것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주는 것.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이야기는 마치 눈처럼, 그리고 눈이 어울리는 겨울처럼 공기를 감싼다.
만약 기술적으로 눈이 여름에도 올 수 있다면, 쨍하고 비치는 덥고 숨이 막히는 계절에 눈이 온다면. 눈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눈은 역시 겨울처럼 차가운 계절에, 입김이 하얗게 나올 때.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내리는 것이 좋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만 알면서도 아예 헛수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던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