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혐오한다는 것



가난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가난을 추억으로 삼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난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가난은 ‘극복‘되어야 한다.
<흥부전>의 흥부처럼.




흥부는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의 일화를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매를 대신 맞아가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던 일화.
29명이나 되는 자식들(금슬이 좋아 자식들이 29명이라고 책에 나와 있다.)을 먹여 살리느라
흥부, 흥부 아내가 힘들게 일했어야 했던 과거의 지난 일들을.




또 흥부는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 ‘가난‘하고 ‘착한‘ 당신은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난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가난은 ‘현재‘이며 극복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또 나에게 주어진 가난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태어나면서 부모와 가정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주위환경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유독 요즘 인터넷 게시판에는 가난한 사람은 자식을 낳지 말라는 글이 눈에 띈다.




그러나 가난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태어나면서부터의 가난은 선택할 수 없지만
일정 시점 이후에도 한 사람이 계속 가난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난이 게으름의 결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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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5-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혐오의 주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주체의 자격에 대해서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