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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자서전 - 인류의 품격있는 진보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유곤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14년 7월
평점 :
세계 5대 자서전 중 한 권을 읽었다. 원제가 <한 혁명가의 회상>인 <크로포트킨 자서전>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5대 자서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나머지를 찾아보았더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그리고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가 더 있었다. <참회록> 중 일부를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읽은 것을 제외하면, 한 권도 읽은 기억이 없다. 특히 크로포트킨이라는 이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실 책 제목 앞에 붙여진 ‘인류의 품격 있는 진보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라는 수식어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거의 55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품격 있는 진보’가 어떤 것인지 꼭 만나보고 싶었기에 주저 없이 책을 잡았다.
처음 서문을 접하면서 좀 진부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자서전 읽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런 우려는 금방 불식되었다. 유년시대부터 살아온 세상이 담담히 그려낸다. 특히 유년시대의 러시아 농노들의 생활상을 접했을 때는 내가 과연 역사를 - 역사는 승자의 몫이고,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고 했지만 - 제대로 공부했는지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작가는 아나키스트다. 혁명을 꿈꾸지만, 폭력이 아닌 연대와 단결의 기치로 말이다.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된 현대 국가를 부정한다. 하지만 대신 민중의 역량을 믿는 정말 순박한 영혼이다.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귀족 후손의 특권을 버리고 진정으로 ‘인류의 품격 있는 진보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였다.
내 느낌으로는 이 책이 5대 자서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겠다. 요즘 널려 있는 자서전 대부분이 정치자금 마련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 책만큼은 인문학이다. 욕심이 없는 글이다. 특히 당시의 생활상을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최대한 배제한 작가의 인품이 돋보인다.
예전에 리오 휴버맨의 <자본주의 바로 알기>를 읽을 때에도 자본주의 초창기의 유럽 생활상이 비교적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표현된 19세기 러시아 농노들의 생활상은 바로 옆에서 직접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아마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로 점철된 이 시기에 시원한 책 한 권 읽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이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5대 자서전 중 읽지 않았던 네 권을 독서 위시리스트에 포함 시켰다. 아울러 크로포트킨의 저서도 몇 권 포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