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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평점 :

유럽 바로크 시대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라는 스케치가 있다. 원래 그림 제목이 없었던 무명의 스케치였는데 1983년 12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미국의 폴 게티 박물관에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 4천 파운드(6억 8천만 원 상당)에 팔려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작품이 가로 38.4센티 세로 23.5센티 자그마한 크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가에 팔렸다는 것이 화제를 모을 만도 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대략 1617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는 조선과 로마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그림 속의 모델이 누구냐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지금까지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이탈리아에 노예로 팔려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소년이라는 것이 다수설로 받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 철릭이라는 조선 초기의 평상복이고, 어른 옷이라는 점에서 이 설은 설득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노예로 팔려간 소년이 어른 옷을 소지하고 갔다는 것도 이상하고, 모델이 입고 있는 철릭 또한 조선 초기의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이라는 것이다.
소설 <한복 입은 남자>는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갑자기 엉뚱한 이유로 사라지는 한 사람에 주목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나, 능력을 세종대왕에게 인정받아 미천한 신분에서 면천되어 종3품 대호군에서 정3품 상호군이라는 관직까지 이른 조선 전기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장영실이 설계한 세종대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퇴출당한다. 그리고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소설은 방송국 PD인 진석이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을 소재로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기 위해 ‘조선의 복식’이라는 전시 프로그램을 취재하러 간 과학관에서 ‘어린이를 위한 우리나라 100대 발명’이라는 전시에서 비차(飛車)를 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가 본 비차는 뜻밖에도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비행기 설계도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형 아래서 만나게 되는 키 작은 서양여자. 둘은 비차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정도로 서로의 갈 길로 헤어진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과학관 주변 식당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신 작가라는 작가가 한 명 더 있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엘레나 꼬레아이고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대학생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복 입은 남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초면에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
진식이 방송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엘레나. 엘레나가 진식에게 해석을 부탁하는 엘레나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왔다는 비망록이 소설의 전반을 이끈다. 도대체 비망록에 담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
이후 소설은 비망록에 남겨진 이야기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밝혀지게 되는데 ……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소설의 내용이 정말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이 소설이 역사적 진실과 너무 어우러져 마치 실록을 재구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장영실의 역사는 세종24년(1442년)에 실록에 실린 이야기를 끝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확인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대신 장영실이 설계했다는 신기전과 자격루 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오랜만에 이야기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정식 출판본이 아닌 가제본으로 읽었는데도 말이다. 스토리가 그만큼 잘 짜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흥미진진하게 잘 구성했다는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소재로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과 다른 점이라면 그림의 주인공을 안토니오 코레아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저자 오세영이 역사를 전공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그리고 다른 루벤스의 그림에 이 모델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의 기적'이라는 작품이다.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역사적인 인물들을 조연으로 출연시킴으로써 소설의 완성도를 더 높였고, 나오자말자 한·중 합작 영화를 제작하기로 합의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사실 영화가 더 기대된다. 아마 세계적으로는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만큼은 큰 호평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깊어가는 가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이 한 권의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금상첨화다. 그렇다고 꼭 특정 장르의 독자일 필요는 없다. 소설 한 편을 계기로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질 기회를 가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