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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잘 알려진 교활한 방법이다. 바로 이 방법에 스미스의 코스모폴리티컬 독트린과 동시대 위대한 정치가 피트의 코스모폴리티컬 경향, 그리고 이후 피트의 정치적 후계자들의 비밀이 담겨 있다.
보호 관세와 항해규제를 통해 다른 국가들이 감히 경쟁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산업과 운송업을 발전시킨 국가의 입장에서는 정작 자신이 딛고 올라온 사다리(정책, 제도)는 치워 버리고 다른 국가들에게는 자유 무역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뒤늦게 자유 무역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참회하는 어조로 선언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은 없을 것이다.
- 리스트의 <정치경제의 국민적 체계>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석학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니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와 동 시대에 살았던 경제학자 리스트가 주장한 내용이다.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지기론의 붕괴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 그리 얼마되지 않았다. 그동안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지적한 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충격이 올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 사는 우리는 신자본주의(New apitalism)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차이를 대부분 모른다. 비슷한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두 용어의 차이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해야겠다. 대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두 용어의 차이는 극복하기를 바란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과거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흔히 중상주의나 자유방임주의 등 여러가지 경제 정책들이 각 나라마다 다르게 시행되었지만 이를 명확하게 정리해준 책이 없어 아쉬웠지만,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다.
자유방임주의라고 이야기 했던 선진국들의 모든 경제정책이 결국은 보호 관세, 수출 보조금, 간접적 임금 지원, 유치산업 보호 등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이루어졌음에도 선진국에서는 이를 외면하고 자유무역을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외침에 동참했던 것이다.
최초로 자유무역을 주창한 영국은 보호관세와 유치산업으로, 그리고 미국은 리스트가 지적한대로 산업을 키웠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 이밖에도 보호관세와 다양한 정부 주도사업을 통해 국내 산업을 키워준 독일, 자유방임의 대표자로 거론되었지만 2차 대전이후 강력한 국가 개입정채을 추구했던 프랑스, 보호관세와 관민 합작을 활용한 스웨덴, 강압에 밀려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적극적인 정부 주도의 산업화 정책으로 선진국이 된 일본. 많은 현재의 선진국들이 역사적으로 밟아온 과정은 그들이 지금 이야기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IMF나 IBRD 등을 통해 경제 침략을 하면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제도들 - 민주주의와 건전한 관료주의, 독립적 사법권, 재산권 보호, 투명한 시장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와 금융기관 - 이 선진국에 정착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순간 멍해지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
그랬다. 결국 서두에서 인용했던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비열한 방법으로 선진국들은 자기들의 이권을 위해 과거 자신들이 사용했던 방법이 나빴다고 후회한다는 거짓말로 호도하면서, 자유무역이 대안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도 보호무역을 가동하면서 말이다.
정말 책을 통해 선진국들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제도들이 정착된 것이 얼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서 아동 노동이나 노동 시간 등 몇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참정권이나 저작권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런 나라가 지금의 선진국이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흔히 워싱턴 합의로 대변되는 제한적 거시경제정책, 국제 무역 및 투자 자유화, 민영화와 규제 폐지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달러를 찍어내는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화폐를 찍어낸다는 것은 찍어낸 만큼의 빚을 만든다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가 과거 IMF 사태를 맞은 것은 외환시장에 돌아다니는 원화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사실 이 책은 독서모임에서 내가 제안해서 독서토론하기로 한 책인데, 아쉽게도 행사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의 역사를 통해 선진국들이 과거 어떤 방법으로 부강할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아직 안 읽었다면 꼭 읽기를 권한다. 경제를 보는 관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