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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저자가 다큐멘터리 사진사와 칼럼니스트로 일하기 때문일까? 근대 이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살림집을 중심에 놓고 시대의 변천사를 기록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기획물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집촌을 이루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게 살림집은 농경문화를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것도 벼농사를 기준으로 말이다. 협업이 무엇보다 강조되었고 그래서 마을을 유지하기 위한 일정한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어긴 사람은 마을에서 배척 시켰다.
외주물집, 외딴집, 독가촌들은 대부분 마을에서 배척당하거나 분재기(분가의 개념)를 통해 또는 화전민들이 살기위한 살림집으로 지어진 집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에 찌들렸고, 벼농사를 짓는 마을민과 차별로 인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런데 이들에게도 희망이 찾아온다. 분교와 간이역, 차부집이 바로 그것.
분교와 간이역은 모두 가난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차부집 역시 도시로 떠나는 전초기지로 마찬가지 의미를 가졌었다. 하지만 분교와 차부집의 도입은 우리가 상상하는 기회균등의 의미보다는 남북 이념 대립에 의한 군사정권의 전국 감시망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래서 요즘처럼 통신망이 잘 갖춰져서 분교나 간이역이 더이상 필요가 없어 폐교시키고, 폐쇄시키는 것인가 보다.
그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외주물집, 외딴집, 독가촌등을 소개시킨다. 이유는 공비들이 은신처로 활용하기 쉽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들이 쫒겨나 오게되는 곳이 도시의 여인숙과 막살이집이다. 여인숙은 장기투숙으로 자리가 잡힐 때까지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고, 막살이집은 움막집, 판자집.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달동네를 생각하면 되겠다.
이 밖에도 미관주택, 시민아파트, 문화주택 등 다양한 살림집이 소개되지만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들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아 잠시나마 어린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좁은 골목길을 통해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집들. 마당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던 주택들. 그러나 가장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사진은 90년대 초에 사라진 비둘기호의 내부 사진이다. 열차여행 하던 때가 그리워진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들은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진이고 책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왜냐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도시 근교를 가더라도 차부집에서 라면이나 삶은 달걀을 먹을 수가 있다. 그뿐아니다. 철로변 변두리에 가면 아직도 막살이집들이 즐비하다. 미관주택과 시민아파트 그리고 문화주택 역시 재개발을 준비하는 곳에서는 많이 눈에 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 용산참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