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 ㅣ 창비 한국사상선 1
정도전 지음, 이익주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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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독서모임이 있다. 거기서 창비가 진행하는 독서모임 이벤트에 같이 참여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고른 책이 #창비 한국사상선 1권, 『정도전』이다. 혼자였으면 아마 손이 안 갔을 책이다.

한국사상선은 정도전부터 김대중까지 우리 사상가 59명을 30권에 담는 시리즈라고 한다. 서점에 가면 니체, 쇼펜하우어 책은 잔뜩 깔려 있는데 정작 우리 한국사상(한국철학) 책은 손에 잡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드라마로 자주 봤고,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누구나 안다. 근데 그 사람이 직접 쓴 글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 책은 이익주 교수가 정도전의 핵심 저작을 골라 현대 말로 옮기고 해설을 붙였다.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같은 책을 처음으로 완역했다고 한다.

읽다 보니 600년 전 이야기가 생각보다 가깝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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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국전』은 1394년 정도전이 태조에게 바친 책이다. 새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 정리한 설계도다. 조선의 헌법 초안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앞에서 왕위와 국호 같은 큰 틀을 세우고, 본편은 여섯 갈래로 나뉜다. 치전, 부전, 예전, 정전, 헌전, 공전. 나중에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 이른바 육전으로 이어지는 그 구조다.

읽다가 웃음이 났다. 너무 익숙해서다. 인사, 재정, 의례와 교육, 국방, 법과 형벌, 건설. 내가 30년 넘게 몸담았던 행정조직도 결국 이렇게 나뉘어 있었다. 이름만 바뀌었지 뼈대는 그대로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우리 부서 일이 원래 어디서 왔는지 따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주어진 칸막이 안에서 일했다. 그 칸막이룰 600년 전에 한 사람이 나누었다는 걸 퇴직하고 나서야 알았다. 좀 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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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건 치전의 재상 이야기다. 정도전은 임금의 자질이 다 같을 수 없다고 본다. 현명한 임금도 있고 어리석은 임금도 있다. 그러니 재상이 임금의 좋은 점은 받들고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다. 임금이 할 일은 좋은 재상을 고르는 것이고, 실제 나라 일은 재상이 이끈다.

왕조 국가에서 임금 앞에 이런 글을 올렸다는 게 좀 놀라웠다. 그것도 막 나라를 세운 태조에게 말이다. 태조가 이걸 읽고 크게 칭찬했다고 하니, 두 사람 사이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편저자 이익주 교수는 이걸 '책임정치'라고 부른다. 왕은 사적인 존재지만, 재상은 공적인 절차를 거쳐 그 자리에 오르니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그래서 이건 누가 책임질 건데"였다. 결재 칸이 늘어날수록 책임은 흐려진다.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정도전은 권한을 주되 책임도 분명히 지우자고 했다. 600년이 지났는데 글쎄 아직도 진행 중이지 않을까?

이 생각은 이듬해 쓴 『경제문감』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재상, 대간, 감사, 수령, 무관까지 자리마다 해야 할 일과 갖춰야 할 자세를 하나하나 짚는다. 요즘 말로 하면 직무 매뉴얼이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이야기인데,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600년 전에도 수령은 수령답게, 감사는 감사답게 일하라는 말을 굳이 글로 남겨야 했던 모양이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결국 양반 관료들의 나라를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재상은 누가 견제하는지, 재상이 백성이 아니라 자기 집안을 위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남았다. 정도전 자신도 결국 왕자의 난에 목숨을 잃었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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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오래 남은 건 부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

말로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근데 정도전은 말로 끝내지 않았다. 호적을 바로잡고, 토지를 고르게 나누고, 세금을 가볍게 하자는 구체적인 제도로 풀었다. 고려 말 권세가들이 땅을 차지하고 백성을 얼마나 쥐어짰는지 그는 직접 봤다. 젊은 시절 나주로 유배를 가서 백성들 틈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책상머리에서 나온 민본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나도 공직에 있을 때 '민원인'이라는 말을 수없이 썼다. 서류 너머에 있는 사람을 건수로만 볼 때가 솔직히 적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였다. 정도전은 제도를 짜는 사람이 그 제도 끝에 있는 사람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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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뜻밖이었던 건 말미에 실린 『삼봉집』의 경복궁 궁궐과 전각 이름 이야기다. 경복궁은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거다. 나도 그렇다. 근데 그 많은 이름을 누가, 왜 그렇게 붙였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1395년 궁궐이 완성되자 태조가 정도전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경복(景福)은 『시경』에서 따온 말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임금과 자손이 오래도록 큰 복을 누리라는 거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싶었다.

전각 이름부터 달라진다. 근정전(勤政殿)은 부지런히 다스리라는 뜻이다. 근데 정도전은 그냥 부지런하라고 하지 않는다. 임금이 부지런해야 할 일은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이라고 끝에 못 박는다. 앞의 재상 이야기와 그대로 이어진다. 날마다 정사를 보는 사정전(思政殿)은 깊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임금이 쉬는 강녕전(康寧殿)에도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야 몸도 편안하다는 당부를 담았다.

읽으면서 이건 이름이 아니라 잔소리구나 싶었다. 일하는 방, 생각하는 방, 쉬는 방마다 신하가 하고 싶은 말을 새겨 놓은 셈이다. 날마다 그 현판 아래를 지나는 임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사무실 벽에 걸린 표어는 수없이 봤다. 그걸 매일 곱씹어 본 적은 솔직히 없다. 정도전은 아예 건물에 새겨 버렸다.

다음에 경복궁에 가면 현판부터 올려다볼 생각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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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설계도인데 낡았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그게 좀 씁쓸하기도 하다. 지금의 설계도가 600년 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좋은 나라는 좋은 임금 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만든다. 정도전이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그거였던 것 같다. 정치하는 사람들 제발 이런 책 좀 읽어라고 소리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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