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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51
이 책의 옮긴이 소개란을 살펴보자:
경희대 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교 관광영어통역학과와 성신여대
영문학과, 한신대 영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경희대 인문학연구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한국여성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 여성주의로 읽어본 대중문화』(공저)
『페미니즘과 정신분석』(공저) 『새 여성학 강의
– 한국사회, 여성, 젠더』(공저) 『여성의
몸 – 시각, 쟁점, 역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안티고네의 주장』 『포스트모던 사상상』(공역) 등이 있다.
버틀러의 글이 난해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초판 서문>의 문장 자체는
별로 난해하지 않다. 그런데도 조현준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장 구조를 해석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다. 8쪽(원문
기준)도 안 되는 분량에서 내가 지적한 오역만 17개다.
이런 영어 실력으로 경희대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조현준이
대단한 건지 경희대 영문학과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영어 실력으로 경희대, 성신여대, 한신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조현준이
대단한 건지 경희대, 성신여대, 한신대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영어 실력으로 그 어렵다는 버틀러의 글을 번역해서 출간했다고
하니 조현준이 대단한 건지 <문학동네>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영어 실력으로 그 어렵다는 버틀러를 공부해서 연구서까지 출간했다고
하니 조현준이 대단한 건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을 출간한 <한국학술정보>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나는 버틀러의 글이 쓸모 없는 횡설수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현준이 아무리 오역을 많이 해 봤자 하나의 횡설수설을 또 하나의
횡설수설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하지만 버틀러를 대단한 여성주의(feminism)
이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번역서를 열심히 정독하면서 버틀러를 논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나까지도 씁쓸해진다.
이 번역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버틀러의 횡설수설이 그 하나의 고통이요, 조현준의 왜곡이 또 하나의 고통이다. 번역서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보아도 그것이 도대체 버틀러의 멍청함에서 나온 것인지 조현준의 멍청함에서 나온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독자들만 불쌍하다.
Butler(xxix쪽)
: Contemporary feminist debates over the
meanings of gender lead time and again to a certain sense of trouble, as if the
indeterminacy of gender might eventually culminate in the failure of feminism.
조현준(73쪽) :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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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 time(시대를 이끌다가)”이 아니라 “time and
again(되풀이해서)”이 한 묶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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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가 아니라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에서 정점을 이루기라도(불확정성이
아주 심해지면 결국 페미니즘이 실패하기라도)”이다.
Butler(xxix쪽)
: To make trouble, within the reigning discourse
of my childhood, something one should never do precisely because that would get
one in trouble. The rebellion and its
reprimand seemed to be caught up in the same terms, a phenomenon that gave rise
to my first critical insight into the subtle ruse of power:
조현준(73쪽) : 내가 어렸을 때
지배적인 담론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키면 누군가가 곤경에 빠지게 되므로
아무도 트러블을 일으켜선 안 되었다. 반동과 그에 대한 비난은 같은 관점에서 파악되는 듯했는데, 이는 아마도 권력의 미묘한 책략에 대한 나의 최초의 비평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현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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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빠지는 사람은 “누군가”가 아니라 트러블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말썽(trouble)을 일으키면 스스로가
곤경(trouble)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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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ellion”은
“반동”이 아니라 “반란” 또는 “반항”이다. 성 차별적인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반동이 아니라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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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term”은 “관점”이
아니라 “단어(용어)”라는
뜻인 듯하다. 반항(rebellion)도 “trouble(말썽 일으키기)”이라는 단어로 포착되고, 질책(reprimand)도 “trouble(말썽을 일으킨 사람이 곤경에 빠지기)”이라는
단어로 포착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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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는
“관심”이 아니라 “통찰”이다.
Butler(xxx쪽) : For that masculine subject of desire, trouble became a scandal with
the sudden intrusion, the unanticipated agency, of a female “object” who inexplicably returns
the glance, reverses the gaze, and contests the place and authority of the
masculine position.
조현준(74쪽) : 남성적 욕망의 주체
때문에 트러블은 이제 여성 ‘대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작인(作因)의 갑작스러운 침범을 받아 스캔들이 되어버렸다. 이 여성 ‘대상’은
불가해하게 시선을 뒤집고, 응시를 역전하고, 남성적 지위의
권위나 장소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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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욕망의 주체 때문에”가 아니라 “남성적 욕망의 주체에게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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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뒤집고”고
아니라 “시선을 되돌려주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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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contest”는
“저항”이 아니라 “경쟁”이다. 남성적 지위나 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여자들도 경쟁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