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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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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북학의
요즘 시대극 중에 <이산>이라는 것이 있다. 정조 임금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컷 중에 한 컷이 있었다. 대수와 이기사 단원들이 수원에 갔다가 쪼매난 사람한테 무지막지하게 맞는데 그의 몸짓은 이제껏 조선 서적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었으니 그가 바로 후일 정조를 도와 <무예도보통지> 무예서를 편찬하게 되는 야뇌 백동수 되시겠다. 아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 야뇌 백동수가 아니라 백동수랑 같이 다니던 사람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막에 이렇게 나온다. 박제가라고 말이다. 서자로 태어나서 정조 시대 신진세력의 근거지가 된 규장각 검서관이되었다. 아참 밝혀두자 박지원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친구 먹었다. 그이가 쓴 중국을 여행하고 쓴 여행기가 <북학의>다.
시대를 아파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 낙후된 조선의 사정을 답답해 하면 선진문물이 가득한 청국을 여행하고 진보된 문명의 이기들을 보고 이러한 이기들이 보급되지 못한 조선이 답답해 <북학의>를 저술했다. 내편과 외편으로 된 2책 1권의 서지를 가지고 있다 서해문집본은 내편 외편 외에도 '진북학의'도 합본 되어 있는데 내편 외편의 요약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편은 중국에서 본 것들 그러나 조선에 없는 것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수레와 벽돌 이야기가 그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실용성에 눈을 뜬 것이다. 명분과 실리에서 실리를 중요시한 서술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수레와 벽돌에 대한 이야기가 동일한 어조로 등장한다. 단순히 시기상으로 보면 박제가가 먼저 중국을 여행했고 , 박지원이 후에 중국을 여행했다. 스승이 제자보다 늦게 중국을 여행한 셈이다. 이 점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그늘에 박제가의 <북학의>가 묻히는 느낌이 들어 밝히고 간다. 이게 좀 과격하게 말하면 벽돌과 수레 성곽에 대한 자료를 박지원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청출어람이라는 말로 덮어두고 가자 . 이 문제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외편은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많이 드러낸 부분이라 개인적 취향에 맞았다. 박제가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 (내편)을 넘어서 뱍제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내편 외편 진북학의를 관통하는 것은 아마도 중국 즉 청국의 문물 - 선진화된 문물 -이다.
외편과 진북학의를 읽다가보면 중국에 대한 경외의 찬사들이 쏟아진다. 사실 중국을 배워야한다는 신념이 여러군데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개화파의 시선과 겹친다. 급진적 개혁과 개화에 경도된 그들은 외국의 것만 받아들일 줄 알았지 그 것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조선의 청년이 서양의 옷을 입은셈이다. 모던보이들과 신여성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들의 모습은 그 당시의 조선과 조금은 불화한 모습으로 비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제가도 시대와 불화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
박제가는 시대를 아파하기 보다는 시대와 불화했다고 봐야한다. 개인적 역량을 펼쳐보일 수 없는 신분제에 혁파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스스로 한계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찬사는 글자 그대로 읽었을 때는 외국의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진 딴스홀에서 춤추고 손님에게 호객하던 모던보이 밖에 되지 않는다. 심하게 오독하면 잘 만들어진 '모화론자'의 변을 읽게 된다. 이 세상의 문물들 중에서 중국 것이 최고야라고 읽힌다. 중국이라는 기호는 다시 한 번 선진문물이라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박제가가 중국 중국을 부릊짖던 것이 성립이된다. 아마도 박제가는 죽을 때에도 중국 중국을 배워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