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2 인애랑 절교 아닌 절교를 하고 난 뒤 거위와 셰펴드의 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괴물같은 셰퍼드를 잡아 세운 건 거위의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그건 셰퍼드와 거위가 공유한 기억, 둘만의 시간이었다. (어릴적부터 함께 자란 거위와 셰퍼드) 제 아무리 성질 사나운 셰퍼드여도, 그 시간의 지배를 받는 거였다.
나를 일상에서 건져낸게 신우라면, 내 머릿속에 몰아치는 광증에서 나를 건져 내는 건 늘 인애였다. 그런 인애가 없으니까 내가 차츰 괴물 셰퍼드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중략- 슈퍼 아저씨한테 쫓겨나 하숙집 골목에 서서 질척질척 울어대면서 깨달았다. 그날 장터에 두고 온 건 인애가 아니라, 인애로 대변되는 나의 세상이었다. 나는 그 세상을 두고 신우 손을 잡아 버린것이다.
P138 언젠가 물리 시간에 들은 반물질 이야기가 떠 올랐다. "보통 전자는 마이나스 전하를 가지고 있다. 그란데, 전자의 반물질이라는 게 있거등. 그거는 뿌라스 전하, 즉 양 전하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믄 무슨 일이 생길까? 뭐 다들 아무 생각이 없제? 쯧쯧, 둘이 만내믄 서로 상쇄돼가 빛으로 바뀌뿐다.
그래서 호킹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당신의 반물질을 만내거들랑 절대로 악수를 하지마라. [시간의 역사]라는 책을 보믄…."
그날 물리에게서 들은 대로라면 나는 지금 현실과 반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거다.
신우가 찾아오기전 나의 삶은 지난 열여덟 해의 하루하루가 쌓인 현실이었다. 인애가 있고, 앙주 옷집 반바지가 있고, 엑스파일 DVD와 조미 쥐포가 있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또 하나의 현실이 나타났다. 신우가 돌아온 것이다.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달아났던 녀석은 훌쩍 자라난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 현실은 벌써 부딪치기 시작했다 퉁퉁 충돌하다 마침내는 물리의 말처럼 빛으로 바뀌어 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이 팽팽한 싸움의 끝은 나의 소멸이다.
P140 "내를 이해하는 건 니밖에 없고, 니를 이해하는 건 내 밖에 없다. 우리 세상에 우리 둘 뿌이다. 모리겄나? 인애라 그랬제? 니 친구, 그 아가 참말로 니를 이해해 줄것 같나? 그 아는 니 인생에 별 관심없다. 갸는 지한테 더 가까운 친구가 생기면 그날로 니를 퇴장시킬 사람이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나중에 함봐라. 니 인생에 끝까지 남는게 낸지 인애라는 그 안지." (신우)
P144 인애가 물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진 자리, 나는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다. 나이 많은 엄마와 소통이 안 될때, 친구들의 젊은 엄마 아빠를 볼 때, 나는 그 자리를 생각했다. 종이 인형을 오려낸 자국 같기도 하고, 스티커를 때어낸 자국 같기도 한 누군가의 빈자리, 그 자리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언제부턴가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자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려준게 신우였다.
P148 "그래, 새 남자, 니 아기 손에서 사탕을 빼앗으면 우찌되는 줄 알제? 아가 자지러진다. 그래서 아기 손에서 사탕을 빼앗을 때는 다른 걸 쥐여줘야 된다. 내는 지금 니한테서 강신우를 빼앗을 참인데, 니가 그걸 못견딜것 같으니까 딴거를 줄라는 기다. 새 남자!" (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