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32 풀과 나무들의 본성은 가을서리 내릴 때를 당해서야 분명히 알게 된다. 갈대는 말라버리고, 참대는 더욱 푸르다. 돌피는 태워 버리고, 벼 알갱이는 거둬들인다. 서리치는 모진 바람이 밤새 불때에는 떨어질 잎은 다 떨어지고 소나무, 잣나무만 끄덕없이 청청하다. 이리하여 가을철은 천지의 대좌기(大坐紀)로, 1년간 지내온 초목도 마감 (磨勘, 중국에서 관리들의 성적을 매기던 제도) 을 보는 심판날이 된다.
개인의 일생에도, 또 어떤 민족의 일생에도 몇 십년에 한번씩, 또는 몇 백년에 한 번씩 이러한 마감날이 온다. 평상시에는 다 비슷비슷하여 별로 차별이 없는 듯하던 이들(개인이나 민족이나)도 이날 우레같은 운명의 호령과 형문, 곤장같은 자작얼(自作孼) 의 아픈 매가 벗은 몸둥이를 후려갈길 때에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탈바가지도 다 집어던지고 대번에 개개 실토를 하게 된다. 이러한 대좌기를 겪고 난 뒤에야 그가 갈대인지 참대인지 무쇠인지 강철인지가 판명되는 것이다.

P333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5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장단점이 오늘 날 우리 중에도 너무 분명하게 너무도 유사하게 드러났다. 그 성질이 드러나게 하는 사건까지도 500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같구나. 우리가 역사를 읽는 재미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P336 수양대군은 인심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고 또 권람과 한명회의 머리는 수양대군을 돕고도 남았다.

P339 그러나 닭 천을 기르면 그 중에도 봉이 난다는 말처럼, 이렇게 명리를 따라 동으로 가고 서로 가는 무리들 중에도 굽혀지지 않는 곧은 무리가 있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비록 수효는 적을 망정 자연히 한 세력을 이루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기치를 내세우고 호령하지 않더러도 충의가 있는 곳에 반드시 따르는 천연의 위엄이 능히 사람으르 하여금 정색하게 하는 것이다. – 중략 – 박제상, 정몽주의 몸에 흐르던 충의의 피는 한강의 물이 마를 때까지 이 땅에 나는 사람의 핏줄에 흐른다.

P341 의인들의 칭찬을 받는 것은 그(수양대군)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가 후년에 국조보감/동국통감 같은 서적을 편찬하게 하고, 유가서/불가서를 언해하게 한 것이 문화사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지만, 자기가 의를 사모하는 자인 것을 의인의 무리가 인정하게 하자는 뜻이 또한 적지 아니한 동기가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P346 수양대군이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말하고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려면 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과 은연히 시국이 이대로 갈 수 없는 것과 그 시국을 처리할 사람이 자기 밖에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나라에 뜻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도와야 한다는 점을 비추면, 조상치는 엄연히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의리가 무너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고, 국가가 큰 사람을 기다리겠지만 그 큰 사람은 의리를 으뜸으로 하는 사람일 것이외다’하고, 듣기에는 비록 부드럽지만 속에는는 추상열일 (秋霜烈日) 같은 무서움을 품은 대답을 하였다.

P350 계유년 변(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난)이 있은 뒤로부터 2년이 못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동안에 왕은 나이를 열 살은 더 먹은 듯이 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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