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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그래 그럴지도......-마르지 않는 상상의 샘 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중앙일보

[커버 스토리] 마르지 않는 상상의 샘 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책 속에 정해진 길은 없다. 삶의 여정에 책이 놓여 있을 뿐.‘나만의 책읽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책의 위상이 떨어질 때 문화의 생산성은 메말라 간다. 인문학의 위기도 결국 책을 통한 상상과 성찰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어떤 목적을 위한 독서를 멈추고 이 가을엔 그저 독서에 빠져보자.

 교과서를 읽는 학생은 부모를 안심시키지만 ‘쓸데없는 책’을 읽는 아이는 부모를 걱정스럽게 한다. 어린 시절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바른 생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저 책과 함께 ‘노는’ 아이였다. 어쩌면 나는 얇은 종이들이 모여 딱딱하게 묶여진 책의 물질적 감촉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랑하던 책은 금성출판사의 세계명작동화 전집이었다. 빨간 색과 파란 색의 하드 커버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한 권, 한 권을 펼칠 때마다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들과 만날 수 있었다.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들 역시 잊지 못할 이름이다. 긴 겨울 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나는 무수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 읽을거리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둑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 나라를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일화와, 영국 네스 호수에 산다는 괴물 네시의 존재, 수억 년 전 멸종된 공룡들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고백하건대, 책은 익숙하고 무료한 현실로부터 새롭고 낯선 세계로 나를 인도해준 마법의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 뉴미디어가 득세하는 시대이지만 책은 여전히 문화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한 대형서점에서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이들. 사진=임현동 기자 

 ‘유희(遊戱)로서의 독서’. 이 말은 자못 불경스럽게 들린다. 놀기 위해 책을 읽는다니. 혹자는 무슨 돼먹지 못한 태도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책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교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흔히 ‘책 읽는다’는 것을 ‘공부’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왔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문자를 습득하고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곧 그가 속한 사회적 규칙과 권위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간주돼 왔기 때문이리라. 그 동안 한국의 교육제도 속에서 ‘책’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곧 제도적 규범의 영역을 의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해야만 하는 정보로 빼곡한 ‘교과서’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제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독서의 고통! 학습의 대상으로 책을 접한 사람들이 책 읽기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혹시 책에 대한 이런 식의 깊은 편견이 책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이제는 책에 대한 수동적인 사고를 거둘 때가 됐다. 자발적인 독서는 읽는 이에게 괴로움이 아닌 쾌락의 순간을 선사한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독서 행위는 문자가 축적한 지식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자유로운 책 읽기는 기존의 권위 속에 갇힌 개인의 의식을 해방시킨다. 책으로 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독서 캠페인 표어 중에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책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지혜와 통찰을 전해준다는 측면에서 이 말은 옳다. 그렇지만 책이 단 하나의 길만을 가르쳐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고 이 책들은 각각 고유한 우주를 품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책은 그 이전의 다른 책들을 부정함으로써 탄생하고,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별만큼 많은 책들은 또 그만큼 다양한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다.

 또한 한 권의 책 속에 반드시 하나의 길만이 제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폐쇄된 성곽이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틈새와 굴곡을 숨기고 있는 활짝 열린 공간이다. 그 책의 세계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서 그 틈새를 파고들고, 채우고, 그 굴곡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몫이다. 이렇게 책에 몸을 담그는 ‘나만의 독서행위’를 통해 그 책은 온전히 ‘나의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한번 읽었던 책을 또다시 꺼내어 읽었을 때,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새로 발견하는 것만큼 신비로운 경험도 드물다. 이 경우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여정 위에 책이 놓여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창조적인 독서가 모여 한 사회 전체의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터인가 ‘책은 죽었다’ 는 풍문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출판 시장의 불황이 심각한 정도를 넘어 ‘대란’ 의 수준이라는 얘기도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가 아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황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와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득세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디지털 영상문화의 확산이 문자문화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장의 논리로만 따진다면 이러한 진단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체의 일시적인 위축이 곧 ‘문자적 사유’전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주 기본적인 측면에서 문자언어와 문자적 사유에 기반하지 않은 ‘영상’ 만의 소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는 문화적 상상력의 기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의 첨단 테크놀로지에 의한 놀라운 스펙터클은 원작자 J R 톨킨의 ‘서사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상 상상적 모험의 원천이 되는 것은 바로 ‘문자의 힘’이다. 또한 영상문화에 담겨 있는 세계관이나 영상문화를 향한 성찰의 언어도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문자언어의 상상력과 성찰의 기반 없이는 창조적이고 비옥한 영상문화의 도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책을 통해 상상하고 성찰하는 능력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모든 문화적 창조력의 고갈이라는 재앙을 의미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책의 위상이 떨어질 때, 그 문화의 생산성은 메말라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의미 있는 움직임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시내 31개 공공도서관과 함께 시작하는 ‘책 읽는 서울’운동은 독서가 모든 기초예술의 근간이라는 자명한 인식 아래 펼쳐지는 것이어서 더욱 반갑다.

 책은 우리에게 언제나 또 다른 삶의 체험을 제공한다. 타인의 가치관에 귀기울이게 해주고, 지금 내가 아는 지식이나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의 ‘바깥’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독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창의적인 존재로 만든다. 꿈꾸는 유목민이 되게 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나는 책을 통해 현실의 저 너머를 살았다. 자그마한 책상 앞에 앉아 『소공녀』의 다락방과 『어린 왕자』의 소혹성 B-612,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를 차례로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책이 준 크나큰 선물이었다. 비록 현실에서는 지구 위의 모든 땅을 여행할 수 없지만, 책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극한’을 경험할 수 있고 ‘극지’ 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인간 존재의 내면에 환하고 단단한 한 톨의 씨앗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 세상의 책을 다 읽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각자 생의 부피만큼의 책을 읽고 갈 수 있을 따름이다. 도서관 서고 가득히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궁금해지곤 한다. 현존하는 저 많은 책들 가운데 먼 훗날 스스로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책’은 무엇일까. 꼭 읽어야 할 그 한 권의 책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다. 하나하나 야금야금 읽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조우하게 될 테니까! 그 미지의 책과 미지의 신세계를, 오늘도 나는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정이현 (소설가) 2004.09.04 09:33 입력 / 2004.09.04 10:26 수정

http://news.joins.com/et/200409/04/200409040933024671a000a200a2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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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weetmagic > [퍼온글] [펌] 한국 출판계의 모습-교수신문

출판동향 : 저자들이 본 오늘의 학술출판
안목 갖춘 편집자와 소통하고 싶다

2004년 06월 07일   강성민 기자 

▲ © 일러스트 김차준
저자와 출판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이건 자명하지만 저자와 출판사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는 의외로 공론화가 거의 없다. 학술출판일 경우 양측은 훨씬 밀도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하지만, 각박한 출판현실은 여러 가지로 이를 어렵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기초학문을 하는 지명도 없는 신진학자들이 엄청난 자비를 들여서 책을 내는 풍경을 보면 그 열악한 현실에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그럴수록 저자와 출판사의 관계는 끊임없이 공론장으로 호출될 필요가 있다. 우리시대 저자들은 출판사들에게 어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絶版의 거대한 연쇄'를 주목해야 한다. 요즘 많은 중소형 학술출판사들이 '초판 6백부 시대'를 열고 있다. 고가정책을 써서 사볼 사람만 보게 하고 책의 생명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사회과학 서적에서 이름 있는 H 출판사는 제작단가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책인데 3만원 육박하는 가격을 붙여 시중에 내놓고 있다.


저자로서는 당연히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이 너무 비싸면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지식을 널리 퍼뜨리려는 지식인의 본심에 위반된다. 문제는 5백권이 1년 정도 후 다 팔리고 나면 그 후의 독자들은 책을 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저자에게 "혹시 보관용이 없냐"고 전화를 해도 무소용이다. 노성두 이화여대 강사는 지난 1997년부터 41권의 저·역서를 냈는데, 현재 10권이 살아있다. 그는 사계절출판사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의 저서 '알베르티의 회화론'이란 어려운 미술이론 교재를 7년째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인쇄하기 때문이다. 노 씨에 따르면 출판사로서는 "책 담당자 왔다갔다하는 경비도 안나오는" 수입이지만, 출판사 측은 개의치 않아 감동적이라는 것.

그많던 학술서들은 어디로 갔을까

열악한 대학출판부나 사장 혼자 편집하고 영업하는 '1인출판사'와 거래하는 저자들은 '독립군'처럼 뛴다. 출판사에 '전문 교열인력'이 없어 저자가 원고를 완벽하게 써야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저자들은 원고를 초고 상태로 만들고 나면 지친다. 더 이상 원고를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다. 이걸 극복하고 저자가 직접 교정을 보더라도 '자기 원고'이기 때문에 잡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출판사가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많아 책이 나오고 난 후에 사소한 오타부터 시작해 한 문단이 빠져버리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한다.


이것은 첫째, 영어 이외의 외국어와 기본적인 학술담론에 익숙한 편집진이 부족한 데서 발생한다. 둘째, 교정을 외부용역으로 넘기는 현재의 '외주시스템'이 많은 오타를 생산하고 있다. 미학이론가 강성원 씨는 "출판사에서는 문장이 어렵다고 쉽게 써달라 하는데, 문제는 출판사들이 '어렵지만 말이 되는 글'과 '어렵고 말도 안되는 글'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시쳇말로 '고친다고 했는데 더 악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강 씨의 말을 토대로 국내 주요 학술출판의 교정실력을 평가하자면 한글맞춤법 같은 '형식교정'은 제법 꼼꼼한 편인데, '내용교정'은 부족한 듯 보여진다.


옛날에는 많은 저자들이 자기 문장을 손도 못 대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요즘도 그런 학자들이 있지만, 경력 있고 전문성과 성실성을 갖춘 편집자와 일을 같이 해본 학자들은 출판사에서 꼼꼼히 원고를 이해한 뒤에 수정요구하면 즐겁게 받아들인다. 특히 번역서일 경우 '문장'이란 게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진다는 법칙을 경험적으로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쪽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출판사는 민음사, 그린비출판사, 푸른역사,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이다. 철학전문 신생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상당수 번역자와 문장과 개념의 '정확성'을 둔 '멱살잡이'로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이를 갖고 타박하는 사람은 드물다. 네그리, 라이히, 가타리 등의 번역서를 내온 윤수종 전남대 교수는 "저자와 출판사간 교정본을 세차례 주고받으면 알맞은 것 같다"라고 경험담을 말한다. 그 정도는 해야 책이 깔끔해진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고집센 저자'들에게도 넌지시 충고하는데, "학술지에 싣는 것이 아니라면, 독자를 위해 문장에 대한 출판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맞다"라고 말이다.


저자들이 대표적 불만의 또 하나는 '지각 출판'이다. 원고를 넘긴지 3년이 넘어도 "밀린 일정이 많아서 출판이 안 되는" 경우는 이만저만한 지각이 아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는 "머레이 북친 책을 출판사에 넘겼는데 몇 년이 있어도 출판이 안됐다. 다른 출판사로 옮기려 해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즘 관련 책도 몇 년을 묵히길래 집어치우라고 했다"라고 털어놓는다. 독자입장에서도 따끈따끈한 해외 학술 동향을 철 지나 읽게 되는 격이라 분명 문제가 있다.


출판사들의 상업성도 학자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박홍규 교수는 자신이 평전 저술가로 명성을 얻자 여기저기서 유명한 사람, 이를테면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씨 평전을 써달라는 요구들을 씁쓸하게 거절하고 있다. 문제는 대형출판사들이 '돈 되는 책'에만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을 너무 전문적이라고 빼자고 압력을 넣는다든지, 책의 제목과 표지를 너무 대중적으로 가져간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문학)는 "이론적인 출사표를 던진다는 기분으로 묵직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는데, 표지를 너무 대중서로 만들어서 항의했다"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출판사는 "속 알맹이나 썼으면 됐지 겉까지 참견하느냐"는 답변을 해왔다. 저자와 출판사간 밀고당기기 풍경이다.


저자들은 또한 대형 출판사들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공장 같다는 문제제기도 하고 있다. 큰 출판사라면 그 규모에 맞게 전문편집진용을 갖추고 일을 그럴싸하게 해야하는데, 관료집단처럼 의사소통과정도 느리고 답답하다는 지적이다. 저자와의 관계도 출판사의 주어진 틀 내에서 통보식으로 이뤄져 종종 "기분 나쁠 정도로 건방지다"라는 불만도 산다. 학술출판이 어렵다보니, 학술서를 내주는 출판사들은 이문을 적게 남기는 대신 저자에게 '유세'하는 일종의 암묵적 권위관계가 양자간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소형출판사에 오면 상황은 더욱 악화돼서 나타난다. 큰 출판사는 그래도 브랜드 이미지도 있고 해서 책을 꼼꼼하게 만드는데, 소형은 책의 종수를 늘려서 시장에 깔아놓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편집체제가 깔끔하지 못하고, 오타도 많다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제작비의 일부분을 저자에게 부담하게 하는 '악풍'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새내기 강사 저자들은 IMF 이전만 해도 70만원 정도의 자기 책을 사주면 출판을 해줬는데, 요즘은 2∼3백만원어치 책을 구입해주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등 갈수록 상황이 안 좋다. 중앙대 교수는 "교수가 되기 위해 책을 내고 집에다 2-3백부 쌓아놓은 후배강사들이 수두룩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세지급의 불투명성은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학술출판은 갈수록 박해지고 있다. 가령 5백부의 책을 초판으로 찍어서 1백부가 팔리면, 그 1백부에 대해서만 인세를 지급하는 경우가 그렇다. 웬만한 양식있는 출판사라면 초판부수에 대해서는 발행후 곧바로 인세를 지급하는 게 불문율인데 말이다. 저자 입장에서는 '출판사가 겨우겨우 연명하는 걸' 보면서 인세를 올려달라고 말하기도 껄끄러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 출판사를 옮겨다니기 일쑤다.

출판사 찾아 배회하는 저자들의 운명

송병선 울산대 교수(스페인문학)는 보르헤스, 마르케스를 비롯한 스페인어권 소설을 꾸준히 번역해온 대표적 번역가다. 그가 출판사에 바라는 것은 '긴 안목'이다. 남미쪽 소설을 내고 싶다고 찾아오는 출판사들이 "단발성으로 내려는지, 아니면 장기기획을 하려는지를 판단하고 출판사를 결정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김욱동 서강대 교수(영문학)는 '전문성'을 본다. 얼마 전 그의 환경문학서를 환경전문출판사인 '나무심는사람'과 작업을 같이 했는데 문학전문 출판사보다 편집자의 원고 해독력이 더 뛰어났다고 전한다.


저자들은 한 출판사와 자신의 '주치의'처럼 꾸준히 계약하는 걸 한번쯤은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상황에서 이는 쉽지가 않다. 꾸준히 사세를 유지하는 출판사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고, 한 출판사에서 계속 내면 주위에서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색안경을 끼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무튼 자신에 맞는, 자신의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게 오늘날 저자들의 운명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사회과학 학술출판사'에 대해 '체계적인 마케팅 능력의 부재'와 ' 원고의 평가, 교열, 편집, 디자인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역량 있는 에디터의 부재'를 대표적 문제로 꼽는다. 박 교수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출판산업의 열악성에 그 원인이 있다며 "공공 도서관, 학술 업적 평가 시스템에 따른 공공 구매 제도 등이 발전"해야 하고, 그래야 출판사들이 단기적 업적 및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책을 평가, 출판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김진 울산대 교수 또한 "학술업적 사후평가제를 도입해 학진의 논문지원을 줄이고, 저술지원을 대폭 늘려서 고만고만한 논문들의 대량양산을 줄이는 대신, 양질의 연구저술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게 한국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도움이 된다"라는 견해를 보였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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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가까와
가랑이-가랭이
가르마-가리마
가리다-가리우다
가만히-가만이
가벼이-가벼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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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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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쩍다-객적다
거두다-걷우다
거친-거칠은
~게끔-~게시리
~게 마련이다-~기 마련이다
겸연쩍다-겸연적다/계면적다
고깔-꼬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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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고히
~고자 함-~고저 함
고집통이-고집퉁이
고치다-낫우다
곤란-곤난
곰곰/곰곰이-곰곰히
곱빼기-곱배기
곱슬머리-곱수머리
광주리-광우리
괴나리봇짐-개나리봇짐
괴로워-괴로와
괴발개발-개발새발
괴팍하다-괴퍅하다
구레나룻-구렛나루
~구려-~구료
구절-귀절
굽이굽이-구비구비
귀때기-귓대기
귀띔-귀틤
귀머거리-귀먹어리
글귀-글구
글자-글짜
급랭-급냉
기어이/기어코-기여히
~기에-~길래
깍두기-깍둑이
깍쟁이(알~)-깍정이
깍정이(도토리~)-깍쟁이
깔때기-깔대기
꼬챙이-꼬창이
꼭두각시-꼭둑각시
끔찍이-끔찍히/끔찌기
나는(하늘을~)-날으는
나무라다-나무래다
나지막하다-낮으막하다
나흗날-나흔날/나흣날
날라 가다[運]-날아 가다
날아가다[飛]-날라가다
날짜-날자
낭떠러지-낭떨어지
내뻗치다-내뻐치다/내뻗히다
냄비-남비
넉넉지-넉넉치
넋두리-넉두리
널따랗다-넓다랗다
널빤지-널판지
널찍하다-넓직하다
널판때기-널판대기
넓적하다-넙적하다
넓죽-넙죽
넷째-네째
~노라고(하노라고 했는데...)-~느라고
녹슨-녹슬은
녹이다-녹히다
농군(農軍)-농꾼
누더기-누덕이
눈살-눈쌀
눈엣가시-눈의가시
~느라고(먹고 오느라고 늦었다)-~노라고
느지감치-늦으감치
늘그막-늙으막
늘어지다-느러지다
늙수그레-늙수구레/늑수그레
늴리리-닐리리
닁큼-닝큼
다다라(다다르다)-다달아
닦달하다-닥달하다
댑싸리-대싸리/답싸리
~더라도-~드라도/~더래도
더욱이-더우기
~던지(어찌나 예쁘던지...)-~든지
덮이다-덮히다
도두보이다-돋우보이다
도리어-도리여
도저히-도저이
돋우다-도두다
돌-돐
돌부리-돌뿌리
두루마리-두루말이
~둥이(쌍~, 검~)-~동이
뒤꿈치-뒷굼치
뒤미처(~따라가다)-뒤미쳐
드디어-드디여
~든지(하든지 말든지)-~던지
들러리-둘러리
따라라(물~)-딸아라
딱따구리-딱다구리
뙤약볕-뙤악볕
뚜렷이-뚜렷히
뚝배기-뚝빼기
~(으)ㄹ걸-~(으)ㄹ껄
~(으)ㄹ게-~(으)ㄹ께
~(으)ㄹ는지-~(으)ㄹ런지
말끔-말짱
말미암아-말미아마
말쑥하다-말숙하다
맛보기-맛배기
망설이다-망서리다
맞춤옷-마춤옷
머금은(머금다)-먹음은
머물러-머물어
머지않아(~봄은 다시 올 것이다)-멀지않아
멀지 않아(친정이~좋다)-머지않아
메밀-모밀
메스껍다-메시껍다
메우다-메꾸다
며칠 몇날-며칠 멷날
모가지-목아지
모가치-몫아치
목도-몫돈
몹시-몹씨
무-무우
무릅쓰다-무릎쓰다
무릎-무릅
미닫이-미다지
미루나무-미류나무
미숫가루-미싯가루
바라다[望]-바래다
바람[所望]-바램
반짇고리-반짓고리
받침(책~)-바침
발자국-발자욱
밭뙈기-밭때기
번번이-번번히
벌쓰다-벌서다
법석-법썩
베개-벼개
별안간-벼란간
본새-뽄새
볼때기-볼대기
부엌-부억
불문율-불문률
붉으락푸르락-불그락푸르락
비계(돼지~)-비게
비로소-비로서
비비다-부비다
빌어먹다-비러먹다
빚쟁이-빚장이
빛깔-빛갈
뻐꾸기-뻐꾹이
뻗정다리-뻗장다리
뽐내다-뽑내다
사글세-삭월세
삼가다-삼가하다
상추-상치
샅바씨름-삿바씨름
새빨갛다-샛빨갛다
새파랗다-샛파랗다
생각건대-생각컨대
생쥐-새앙쥐
서랍-설합
서슴지-서슴치
섣달-섯달
섣불리-서뿔리
설거지-설겆이/설겆이
설레다-설레이다
성냥개비-성냥개피
~성싶다-~상싶다
셋째-세째
소꿉질-소꼽질
소박이(~김치)-소배기
손뼉-손벽
솔직히-솔직이
수꿩-수퀑
수놈-숫놈
수말-숫말
수수께끼-수수꺼끼
수탉-숫닭
숟가락-숫가락
숨바꼭질-숨박꼭질
숫양-수양
숫염소-수염소
숫쥐-수쥐
~습니다-~읍니다
승낙-승락
~시오-~시요
신출내기-신출나기
실낙원-실락원
싫증-실증
십상-십성
쌍둥이-쌍동이
썩이다-썩히다
아니하다(밥을 먹지~)-아니 하다
아니 하다(오늘은 공부를 아니 합니다)-아니하다
아리땁다-아릿답다
아무튼-아뭏둔
아지랑이-아지랭이
악바리-악발이
안간힘-안깐힘
안절부절못하다-안절부절이다
알배기(생선~)-알박이
암탉-암닭
애달프다-애닯다
야트막하다-얕으막하다
얄따랗다-얇다랗다
언뜻-펀뜻
언덕배기-언덕빼기
얼루기/얼룩-얼룩이
없음/있음-없슴/있슴
엊그저께-엇그저께
엎지르다-업지르다
~에는-~엘랑
에다(살을~)-에이다
여물다-영글다
여태/여태껏-여직/여직껏
역성들다-편역들다
연거푸-연거퍼
예부터/옛날부터-옛부터
예쁘다-이쁘다
예삿일-예사일
예스럽다-옛스럽다
오뉴월-오륙월
오뚝이-오뚜기/오똑이
오라비-오래비/올아비
오랜만-오랫만
오조증(惡阻症)-악조증
오지랖-오지랍
올바르다-옳바르다
~올시다-~올씨다/~올습니다
왠지-웬지
외톨이-외토리
요술쟁이-요술장이
요컨대-요컨데
우두커니-우두머니
우레-우뢰
우리다-울그다
우스워-웃으워
움큼-웅큼
웃어른-윗어른
웬일-왠일
윗사람-웃사람
으레-의례/으례
읊다-을프다
이따가(~보자)-있다가
있다가(한참~)-이따가
이파리-잎파리
익숙지-익숙치
일찍이-일찌기
있소-있오
자국-자욱
자그마치-작으마치
자지러지다-자질어지다
잔디-잔듸
잠가(잠그다)-잠궈
장사꾼-장삿군
재떨이-재털이
저녁-저녘
적이-저으기
절체절명(絶體絶命)-절대절명
조그마하다-조그만하다
좀처럼/좀체-좀체로/좀해선
주근깨-죽은깨
주워[拾]-줏어
주책-주착
주책없다-주책이다
지루하다-지리하다
~지 마라-~지 말아
짊어지다-질머지다
집게손가락-검지손가락
짓무르다-진무르다
짤따랗다-짤다랗다
찌개-찌게
찧다-찌다
쳐부수다-쳐부시다
촉촉이-촉촉히
추수르다-추스리다
추어올리다-추켜올리다
치다꺼리-치닥거리
칸-간
케케묵다-켸켸묵다
코빼기-콧배기
통째로-통채로
통틀어-통털어
퇴고(推敲)-추고
툇간-퇴깐
튀기-트기
티격태격-티각태각
푿소-풀소
풋내기-풋나기
핑계-핑게
하늬바람-하니바람
하루거리-하루걸이
하릴없다(하릴없이 먼 산만 바라보다)-할일없다
하마터면-하마트면
핫바지-합바지
해님-햇님
해코지-해꼬지
햅쌀-햇살
허우대-허위대
헝겊-헝겁
홀아비-호라비/호래비
휴게실-휴계실
흠집-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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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가까와
가랑이-가랭이
가르마-가리마
가리다-가리우다
가만히-가만이
가벼이-가벼히
간질이다-간지르다
갈치-칼치
강낭콩-강남콩
개구쟁이-개구장이
개다(날씨)-개이다
객쩍다-객적다
거두다-걷우다
거친-거칠은
~게끔-~게시리
~게 마련이다-~기 마련이다
겸연쩍다-겸연적다/계면적다
고깔-꼬깔
고삿(겉~)-고샅
고이-고히
~고자 함-~고저 함
고집통이-고집퉁이
고치다-낫우다
곤란-곤난
곰곰/곰곰이-곰곰히
곱빼기-곱배기
곱슬머리-곱수머리
광주리-광우리
괴나리봇짐-개나리봇짐
괴로워-괴로와
괴발개발-개발새발
괴팍하다-괴퍅하다
구레나룻-구렛나루
~구려-~구료
구절-귀절
굽이굽이-구비구비
귀때기-귓대기
귀띔-귀틤
귀머거리-귀먹어리
글귀-글구
글자-글짜
급랭-급냉
기어이/기어코-기여히
~기에-~길래
깍두기-깍둑이
깍쟁이(알~)-깍정이
깍정이(도토리~)-깍쟁이
깔때기-깔대기
꼬챙이-꼬창이
꼭두각시-꼭둑각시
끔찍이-끔찍히/끔찌기
나는(하늘을~)-날으는
나무라다-나무래다
나지막하다-낮으막하다
나흗날-나흔날/나흣날
날라 가다[運]-날아 가다
날아가다[飛]-날라가다
날짜-날자
낭떠러지-낭떨어지
내뻗치다-내뻐치다/내뻗히다
냄비-남비
넉넉지-넉넉치
넋두리-넉두리
널따랗다-넓다랗다
널빤지-널판지
널찍하다-넓직하다
널판때기-널판대기
넓적하다-넙적하다
넓죽-넙죽
넷째-네째
~노라고(하노라고 했는데...)-~느라고
녹슨-녹슬은
녹이다-녹히다
농군(農軍)-농꾼
누더기-누덕이
눈살-눈쌀
눈엣가시-눈의가시
~느라고(먹고 오느라고 늦었다)-~노라고
느지감치-늦으감치
늘그막-늙으막
늘어지다-느러지다
늙수그레-늙수구레/늑수그레
늴리리-닐리리
닁큼-닝큼
다다라(다다르다)-다달아
닦달하다-닥달하다
댑싸리-대싸리/답싸리
~더라도-~드라도/~더래도
더욱이-더우기
~던지(어찌나 예쁘던지...)-~든지
덮이다-덮히다
도두보이다-돋우보이다
도리어-도리여
도저히-도저이
돋우다-도두다
돌-돐
돌부리-돌뿌리
두루마리-두루말이
~둥이(쌍~, 검~)-~동이
뒤꿈치-뒷굼치
뒤미처(~따라가다)-뒤미쳐
드디어-드디여
~든지(하든지 말든지)-~던지
들러리-둘러리
따라라(물~)-딸아라
딱따구리-딱다구리
뙤약볕-뙤악볕
뚜렷이-뚜렷히
뚝배기-뚝빼기
~(으)ㄹ걸-~(으)ㄹ껄
~(으)ㄹ게-~(으)ㄹ께
~(으)ㄹ는지-~(으)ㄹ런지
말끔-말짱
말미암아-말미아마
말쑥하다-말숙하다
맛보기-맛배기
망설이다-망서리다
맞춤옷-마춤옷
머금은(머금다)-먹음은
머물러-머물어
머지않아(~봄은 다시 올 것이다)-멀지않아
멀지 않아(친정이~좋다)-머지않아
메밀-모밀
메스껍다-메시껍다
메우다-메꾸다
며칠 몇날-며칠 멷날
모가지-목아지
모가치-몫아치
목도-몫돈
몹시-몹씨
무-무우
무릅쓰다-무릎쓰다
무릎-무릅
미닫이-미다지
미루나무-미류나무
미숫가루-미싯가루
바라다[望]-바래다
바람[所望]-바램
반짇고리-반짓고리
받침(책~)-바침
발자국-발자욱
밭뙈기-밭때기
번번이-번번히
벌쓰다-벌서다
법석-법썩
베개-벼개
별안간-벼란간
본새-뽄새
볼때기-볼대기
부엌-부억
불문율-불문률
붉으락푸르락-불그락푸르락
비계(돼지~)-비게
비로소-비로서
비비다-부비다
빌어먹다-비러먹다
빚쟁이-빚장이
빛깔-빛갈
뻐꾸기-뻐꾹이
뻗정다리-뻗장다리
뽐내다-뽑내다
사글세-삭월세
삼가다-삼가하다
상추-상치
샅바씨름-삿바씨름
새빨갛다-샛빨갛다
새파랗다-샛파랗다
생각건대-생각컨대
생쥐-새앙쥐
서랍-설합
서슴지-서슴치
섣달-섯달
섣불리-서뿔리
설거지-설겆이/설겆이
설레다-설레이다
성냥개비-성냥개피
~성싶다-~상싶다
셋째-세째
소꿉질-소꼽질
소박이(~김치)-소배기
손뼉-손벽
솔직히-솔직이
수꿩-수퀑
수놈-숫놈
수말-숫말
수수께끼-수수꺼끼
수탉-숫닭
숟가락-숫가락
숨바꼭질-숨박꼭질
숫양-수양
숫염소-수염소
숫쥐-수쥐
~습니다-~읍니다
승낙-승락
~시오-~시요
신출내기-신출나기
실낙원-실락원
싫증-실증
십상-십성
쌍둥이-쌍동이
썩이다-썩히다
아니하다(밥을 먹지~)-아니 하다
아니 하다(오늘은 공부를 아니 합니다)-아니하다
아리땁다-아릿답다
아무튼-아뭏둔
아지랑이-아지랭이
악바리-악발이
안간힘-안깐힘
안절부절못하다-안절부절이다
알배기(생선~)-알박이
암탉-암닭
애달프다-애닯다
야트막하다-얕으막하다
얄따랗다-얇다랗다
언뜻-펀뜻
언덕배기-언덕빼기
얼루기/얼룩-얼룩이
없음/있음-없슴/있슴
엊그저께-엇그저께
엎지르다-업지르다
~에는-~엘랑
에다(살을~)-에이다
여물다-영글다
여태/여태껏-여직/여직껏
역성들다-편역들다
연거푸-연거퍼
예부터/옛날부터-옛부터
예쁘다-이쁘다
예삿일-예사일
예스럽다-옛스럽다
오뉴월-오륙월
오뚝이-오뚜기/오똑이
오라비-오래비/올아비
오랜만-오랫만
오조증(惡阻症)-악조증
오지랖-오지랍
올바르다-옳바르다
~올시다-~올씨다/~올습니다
왠지-웬지
외톨이-외토리
요술쟁이-요술장이
요컨대-요컨데
우두커니-우두머니
우레-우뢰
우리다-울그다
우스워-웃으워
움큼-웅큼
웃어른-윗어른
웬일-왠일
윗사람-웃사람
으레-의례/으례
읊다-을프다
이따가(~보자)-있다가
있다가(한참~)-이따가
이파리-잎파리
익숙지-익숙치
일찍이-일찌기
있소-있오
자국-자욱
자그마치-작으마치
자지러지다-자질어지다
잔디-잔듸
잠가(잠그다)-잠궈
장사꾼-장삿군
재떨이-재털이
저녁-저녘
적이-저으기
절체절명(絶體絶命)-절대절명
조그마하다-조그만하다
좀처럼/좀체-좀체로/좀해선
주근깨-죽은깨
주워[拾]-줏어
주책-주착
주책없다-주책이다
지루하다-지리하다
~지 마라-~지 말아
짊어지다-질머지다
집게손가락-검지손가락
짓무르다-진무르다
짤따랗다-짤다랗다
찌개-찌게
찧다-찌다
쳐부수다-쳐부시다
촉촉이-촉촉히
추수르다-추스리다
추어올리다-추켜올리다
치다꺼리-치닥거리
칸-간
케케묵다-켸켸묵다
코빼기-콧배기
통째로-통채로
통틀어-통털어
퇴고(推敲)-추고
툇간-퇴깐
튀기-트기
티격태격-티각태각
푿소-풀소
풋내기-풋나기
핑계-핑게
하늬바람-하니바람
하루거리-하루걸이
하릴없다(하릴없이 먼 산만 바라보다)-할일없다
하마터면-하마트면
핫바지-합바지
해님-햇님
해코지-해꼬지
햅쌀-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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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 준다고?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꽤 재미있는 대사를 들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기억나는 대로 옮기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드라마 내용에서 산타클로스에 비유된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었지만, 내 상상의 나래는 엉뚱한 곳으로 번져 나갔다. 예컨대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는 많은 출판인들의 믿음이 혹 산타클로스였던 것은 아닐까.

만성적인 불황, 축소일로에 있는 시장, 그나마 실용서 중심의 편중된 소비 형태 심화와 같은 누가 보아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우려와 위기의식이 자못 진지하게 이야기될 때 어김없이 타개 방안을 모색한다며 내놓는 내용들은 대략 큰 줄기에서 ‘더 열심히 더 좋은 책을 만들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면서, 은연중 ‘출판인들이 안일하고 게을러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잡지 못한 데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전제를 암시하면서, 짐짓 겸손한 척 다짐을 두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그래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무작정 더 부지런히 따라가 주기만 하면 위기가 타개될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출판인들의 조바심이 이미 잠재해 있는 위기를 부추겼다고 믿는 편이며, 원인 파악과 대안 모색이 그야말로 ‘안일하고 게으르게도’ 여전히 그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한 위기는 점점 더 심화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독자들의 욕구가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 그것은 출판 매체에 대한 욕구가 예컨대 이런 종류의 출판물에서 저런 종류의 출판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의 욕구는 근본적으로 출판 매체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독자’가 아니게 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니 언필칭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간다’는 것은 겸손하게 출판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 자명한 결론을 차마 직시하기 두려워서 ‘그래도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준다’고 되뇌는 것은, 고작 주관적인 희망 사항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객관적인 진리라도 되는 양 자기 최면을 거는 딱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안한 말이지만, 출판 매체가 위기를 맞은 것은 독자들에게서 더 이상 ‘좋은 책’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한사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안간힘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은 푸른기와집의 주인이 된 어느 정치인은 한때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대의 정치 제도 아래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대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막말로 소비자가 마약을 원한다면 기꺼이 마약이라도 만들어 팔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좋은 책’을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만드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적극적인 대안으로 내놓는 이야기가 ‘좋은 책’을 널리 알리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위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과녁을 한참 빗나간 화살이다. 출판 시장 특히나 인문 교양서 시장에서 ‘광고’의 효과가 의심받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심지어 ‘백광이 불여일홍’――백 번의 광고보다 한 번의 홍보(기사화)가 더 효과가 크다――이라고 익살스럽게 표현되던 ‘서평 기사’조차 책에 대한 인지도는 높일지 몰라도 좀체로 구매로 연결되지 않더라는 한숨 소리도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출판 산업의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할 뿐이라는 일각의 비판과 우려 속에서도 방송 매체를 통한 홍보의 가능성을 요란하게 선포했던 <느낌표>의 반짝 열기마저도 조금씩 약발이 떨어져 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정직해지자. ‘좋은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알릴 방법이 없는 것은, 홍보 방법이 구태의연해서가 아니라 ‘책’이라는 상품에 관심을 가진 소비자층의 규모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홍보 이벤트는 잠깐 동안 시선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일단 돌아선 발길을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다. 책은 다른 어느 상품보다도 ‘충동 구매’가 어려운 속성을 가진 상품이며, ‘말을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설령 책을 사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책을 읽고 내용을 소화하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두 번의 ‘충동 구매’는 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매개하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책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얼마 전 만난 어느 대학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이 텍스트를 이해하고 자기 머릿속에서 정리해서 표현하는 능력이 수준 이하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과제물을 내주며 아무리 친절하게 작성 요령을 설명해 주어도 그 충실도는 차라리 둘째치고라도 ‘제대로 된’ 과제물을 찾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논술 시험’의 경쟁까지 뚫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는 게 일과인 학생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그 경쟁에서조차 낙오되어 당장 밥벌이에 바쁜 젊은이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의심스러운 그들이 (문자 텍스트가 아닌) 영상 택스트라고 해서 제대로 수용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선정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기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그야말로 ‘안일하고 게으른’ 태도이다.

영상 매체가 아무리 위력을 떨치고 디지털 매체가 일상을 파고들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책의 필요성은 감소하지 않는다. 출판 매체는 다른 매체들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책을 읽어야 할 필요, 더 넓게는 매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과 소통할 필요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책을 읽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유행 상품을 소비하고 인터넷 게임을 즐기며 일상을 영위한다. 그것이 ‘독자들의 변화하는 욕구’의 정체이다. 그러니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는 스스로도 믿지 않을 입에 발린 거짓말일랑 집어치우고, 더 좋은 책을 찾아 읽게 해 주는 두터운 기반이 될 인문적 자산으로 축적되기보다는 한때의 유행 상품으로 소비되고 말 물건을 더 열심히 부지런히 만들어 보겠노라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더 떳떳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출판 시장의 위기는 출판 산업의 범위를 넘어선 지평에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소통(communication)의 위기에까지 시선이 닿지 않는다면, 예컨대 날로 가중되는 무한 경쟁의 압력 속에서 타인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의 노예’가 되어 가는 상황 자체를 타개할 방안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좋은 책’을 알아줄 독자는 고사하고 ‘좋은 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조차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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